죽음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비롯되는 '인간됨', '삶의 의미'
지난주부터 토요일 오전마다 2시간씩 줌으로 '일상 세계와 철학적 사유'를 주제로 한 이론 그룹 모임에 참여하고 있다. 몇 년 전부터 여러 권의 저서를 통해 많은 가르침과 지적 도전을 던져주었던 분이 여는 이론 그룹이어서 많은 관심이 가기도 했고, 통일학으로 박사과정을 하며 원래 전공했던 심리학뿐만 아니라 정치, 법학, 사회학 등 다양한 주제를 더 다루게 되면서 '철학'에 대한 목마름이 늘 있었기에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부끄럽지만 더 나이가 어렸던 철없던(지금도 없는 것 같지만...) 시절에는 '철학'이라고 하면 '돈 안 되는 학문, 성적이 낮아서 다른 과에 가지 못하면 2 지망, 3 지망으로 가게 되는 최후의 보루 같은 과(철학과)'라고 무식하고도 얄팍한 인식을 가진 적도 있었다. 철학 공부해서 밥벌이는 할 수 있을까, 저런 건 누가 공부할까 하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그런데 박사과정을 하며 2~3년 전부터 자연스럽게 '철학'의 중요성이 많이 와닿고, 왜 여태 철학 공부를 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과 후회가 많이 들었다. 모든 학문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유하는 능력'이고, 지식으로서의 학문 세계뿐만 아니라 일상에서, 개인사와 역사에서 만들어가는 수많은 크고 작은 결정과 판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 역시 '사유하는 능력'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사유하는 능력'이 길러지기 위해선 '철학'에 대한 지식과 이해가 바탕이 된다.
이렇게 '철학'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면서 깨작깨작 한나 아렌트나 데리다의 책을 읽어보고 다른 철학자들의 책들을 뒤적이며 철학의 세계에 기웃기웃하고 있지만, 여전히 나는 철학을 잘 알지 못한다. 그래서 언젠가, 아마도 곧 해야 할 숙제처럼 많은 철학자들의 이름과 그들이 남긴 저작에 언젠가 가닿아야지 하는 부담감을 갖고 있다.
오늘 세미나에서 유난히 마음에 남았던 부분은 야스퍼스가 이야기했다는 '한계상황'에 대한 것이다. 인간이 죽음과 질병, 좌절과 같은 실존적 도전, 존재의 한계와 소멸에 대해 인식하면서 '아하'하고 깨닫는 순간(Aha moment)을 경험한다는 것이다. 아끼는 사람의 죽음, 지인의 갑작스러운 죽음 등을 계기로 죽음에 대해 매일 인식하면서 오히려 우리는 다른 한편으로는 어떻게 의미 있는 삶을 매일 영위할 것인가 고민하게 되며, 그렇기에 철학은 철학자들만의 몫이 아니라 일상생활 한가운데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유한한 존재로서의 한계성을 갖고 태어남에도 불구하고 죽지 않을 것 같은 착각을 하며 살아가던 우리의 일상 속에 '죽음'이라는 사건은 파장을 일으킨다.
하이데거 역시 저서 <존재와 시간>에서 '과거-현재-미래'라는 시간성에 대한 인식이 인간과 동물을 구분 짓는 분기점이 된다고 보았다. 동물과 식물은 단지 소멸(perish)할 뿐이지만, 인간만이 '죽음성'에 대해 인식할 수 있기에 그렇다.
이들의 죽음과 존재, 삶에 대한 성찰, 철학적 사유가 크게 와닿은 것은 그들과 만나기 전부터 이미 내가 어느 정도는 어슴푸레 느끼고 알았던 감정이나 생각에 '이름'을 붙이고, 개념화하는 데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나를 세상에 존재하도록 해주었으며, 나의 세계(universe)를 형성하고, 그 안에서 매우 큰 지분을 갖고 있던 사람, 그 누구와도, 그 누구로도 대체할 수 없는 '엄마'라는 존재가 떠나가기까지의 과정과, 그가 떠나던 그 순간, 그리고 그가 떠난 이후.
'삶의 의미'와 '인간의 유한성', '죽음과 삶' 혹은 '삶과 죽음', '탄생과 소멸'이라는 주제에 관해 그토록 깊이, 가깝게 느껴본 적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생명력과 활기가 넘치던 육체와 정신이 점점 사그라져가고 생기를 잃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삶이란 것은 무엇이고, 죽음 이후에는 어떤 세계가 있을지, 또 남겨진 우리에게는 어떤 삶이 펼쳐질지 막연한 두려움과 불안함이 온 마음과 생각을 지배했다.
여기에 더해 호스피스 병동에서 엄마의 마지막 4개월간을 보내며 매일 옆 병동의 환자들이 들고 나는 것을 보며 인생에서 가장 짧은 시간 동안 가장 많은 죽음을 압축적으로 경험했다. 그 어떤 사람의 삶과 죽음도 하나도 동일한 것이 없을 텐데, 그들의 삶과 죽음은 남아있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기억되고 기록되었을까 하는 의문이 생겼다.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던 그 무렵, 딱 지금 이맘때의 그 계절에 엄마를 만나러 가는 길, 카페에 들러 커피 한 잔을 손에 들고 거리를 걸었다. 때 이른 겨울맞이용 컵홀더로 단장한 커피잔과, 아파트 담벼락에 아직 고운 단풍색을 자랑하며 늘어져 있는 담쟁이 넝쿨을 바라보며 가을과 겨울, 계절의 교차를 실감했다. 그렇게 누군가는 떠나보낼 준비를, 또 누군가는 맞이할 준비를 하는 것이 세상의 이치인가 보다 하면서.
분명 이 세상에는 수많은 죽음과 탄생이 존재하고, 내가 인지하기 전부터 내 주변에는 수많은 '죽음'이 있었을 텐데, 내 사랑하는 이에게 그 차례가 돌아오기 전까지 나는 '죽음의 근접성'을 전혀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세상에 수많은 질병이 있지만 나는 걸리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건강에 관한 긍정 편향처럼 다른 사람에게는 일어나도 나에게는 결코 일어나지 않을 일이라고 그렇게 막연한 긍정 편향에 기대어 살아왔던 것이다.
엄마가 떠나고 난 후, '삶의 의미'에 대한 질문은 지금까지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죽음'이라는 상실을 경험하고 난 후, 삶이 주는 유한성을 깨달았으니 매일매일에 더욱 최선을 다해야겠다는 사명감만이 가득할 것 같지만, 실상 꼭 그렇지만은 않다. 어떤 때에는 모든 것이 다 부질없고, 이렇게 아등바등 살 필요가 있나,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 때도 많다. 이런 마음가짐은 '관조적 자세'와 '여유', '초월'이라는 선물을 주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회의론적 태도', '염세주의'로 이어질 가능성도 있다. 그렇기에 늘 그 양 극단을 외줄 타기 하는 기분으로 나름의 균형을 맞추려는 의지적 노력이 필요하기도 하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경험을 하고 나니, 그동안 보이지 않았던 주변의 많은 '상실을 경험한 사람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부모님이나 형제자매, 배우자, 자녀 등을 질병이나 사고 등으로 갑작스럽게 떠나보낸 이들이 생각보다 많았고, 나이가 들다 보니 그런 상실의 경험을 하는 주변 지인들도 점점 많아지고 있다.
학부시절 '임상심리학' 수업을 들을 때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를 공부하며 외상적 사건을 경험한 사람들을 인터뷰하는 과제가 있었다. 그때 나는 친구 중 한 명과 인터뷰를 했는데, 인터뷰를 하며 그 친구가 이런 말을 했다.
"내 삶은 죽음과 항상 가까이 있었어."
그때는 이 말이 무슨 의미인지 미처 다 알지 못했다. 가까운 이의 죽음을 경험해본 적도, 그것이 가져오는 슬픔과 무게, 삶에 미치는 영향을 경험해본 적도 없던 나로서는 친구의 그 말을 감히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조차 알지 못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며 친구의 그 말이 점점 더 또렷하고 선명하게 들려온다. 그러면서 그 친구는 나에게 이 말을 해주었던 그 시절, 그때까지 삶을 살아오며 죽음과 삶에 대한 얼마나 많은 질문들과 성찰들을 해왔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삶은 얼마나 고단하고 힘이 들었을까 새삼 뒤늦은 안쓰러움이 찾아왔다.
그리고 몇 달 전, 또 다른 친구가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기에 슬픔과 충격이 더욱 컸다. 세상을 떠나기 전 며칠간 과정과 세상을 떠난 후 그를 기리며, 그리며, 애도하는 이들의 모습을 통해 '삶의 의미'를 또 한 번 깊이 생각해보게 되었다. 짧은 생을 살다 갔지만, 그 누구보다 크고 선한 영향력을 많이 남기고 간 친구의 발자취를 돌아보며, 그 친구의 삶은 참으로 값지고 의미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나는 과연 죽음 이후 사람들에게 무엇을 남길 수 있을까, 어떤 사람으로 기억될까 하고 나를 돌아보기도 했다. 그리고 남은 우리들은, 사랑하는 친구를 잃은 상실을 어떻게 슬퍼하고 애도하며 건강한, 그 친구가 우리에게 남겨주었던 것만큼이나 큰 의미를 갖는, 충만하고 온전한 것으로서의 삶을 살아나갈 수 있을까 고민하게 되었다.
'삶'이 있기에 '죽음'이 있고, '죽음'이 있기에 '삶'이 있다.
그렇기에 죽음을 경험하는 존재로서 유한한 존재인 우리는, 누구나 다 '철학자'일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