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과 ‘소통’의 중요성- 진보와 보수, 난민을 바라보는 창
지난번에 이어 난민 지원 단체에서 교육을 들었다. 이 단체에서는 한국에 들어와 있는 난민 신청자들이 겪는 여러 가지 어려움들을 함께 하고 지원하는 방법의 일환으로 심리적 지원을 제공하고 있는데, 앞으로 그 과정에 활동가로 함께 하기 위함이다.
한국에서든 해외서든 난민들이 지위를 인정받기까지는 지난한 과정이 이어진다. 난민 신청을 하고 나서도 짧게는 몇 개월, 길게는 몇 년이 걸리는데 오랜 기다림 후에도 난민으로 인정받을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다. 우리나라의 경우 난민 인정률이 0.7% 정도로 매우 낮은 편이고 인터뷰를 비롯한 법적 처리 과정에 대개 수년이 소요된다고 한다.
처음 난민들을 위한 심리지원 활동가 모집 공고를 봤을 때, 하고 싶다는 생각과 망설여지는 맘이 반반이었다.
스위스와 독일, 네덜란드에 있을 때 아랍을 비롯한 다양한 국가 출신의 난민들, 탈북난민들을 만난 경험이 있었기에 난민에 대해서는 늘 어느 정도 마음이 쓰였다. 하지만 반대로 난민이라는 특수한 지위와 그들이 경험하는 트라우마 등으로 인해 더 어려울 수 있는 난민 심리지원 활동에 겁 없이 나서도 되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렇게 우물쭈물 결단을 못 내리는 사이 시간이 흘렀고 ‘그래 나는 아직 준비가 안됐지’하며 다음에 기회가 되면 해봐야지 하고 마음속에서 떠나보냈다.
그런데 온 우주의 기운이 도와 나를 이 방향으로 이끌어가는 것처럼 다양한 사람들, 단체들과의 만남을 통해 난민이나 디아스포라 관련해서 계속 연결이 되었고, 기회를 놓쳤다고 생각했던 이 난민 지원 단체와도 다시 연이 닿았다. 어쩌면 내가 그 방향으로 스스로를 몰고 간 것일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교육 중 난민들의 상황이나 그들의 사연을 듣다 보니 스위스와 독일, 네덜란드에서 만났던 이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박해와 고통을 피해 고국을 떠나 새로운 나라에 적응하며 문화적, 언어적 어려움과 함께 일자리를 구하기 어려워 생계와 직결된 경제적 어려움, 안정된 주거환경의 결핍, 육아와 일 사이에서 어려움을 경험하고 있던 난민들. 본국에서 누리던 경제적 지위나 직업적 지위, 전문지식 등을 활용하지 못하고 배경에 관계없이 소수자로서 밑바닥부터 시작해야 하는 그들의 막막함과 고립감, 단절감.
교육 중 인터뷰 영상에서 본 한 난민 신청자는 이렇게 말했다.
“Open a window for us. If a door is too big to open, please open a small window first.
우리에게 창문을 열어주세요. 문이 너무 커서 열기가 어렵다면 작은 창문이라도 먼저 열어주세요.”
문을 열어주기가 어렵다면 작은 창문이라도 우선 열어달라는 그의 말에 왠지 마음이 아프고 짠했다. 이 짧은 호소에 그가 난민으로서 한국사회에서 겪은 차별과 어려움이 고스란히 묻어났기 때문이다. 난민들 역시 자신들이 이곳에서 환영받지 못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문을 열 수 없다면 창문만이라도 열어주기를 소망했던 것이리라.
한국사회뿐만 아니라 미국과 유럽에서도 난민 이슈는 뜨거운 감자다. 세계화, 세계시민사회, 다양성의 필요성에 대한 논의와 함께 반대편에서는 내셔널리즘, 배타적 애국주의, 극보수가 심화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낯선 이들, 나 또는 우리와 다르다고 여기는 존재들이 그렇게 큰 위협으로 느껴지는 것은 그들이 가져올 변화, 안정적이고 안전한 우리 사회와 공동체를 위협할 것이라는 두려움에서 기인한다. 그리고 이런 두려움과 적대감은 상대방을 만나고 이야기 나눈 경험이 없거나 적을수록 더 크게 마련이다.
에버렛 워딩턴의 선행연구에서는 상대 집단과의 교류가 없거나 적을수록 상대방에 대한 부정적 감정이 큰 것으로 나타났다. 반대로 상대 집단에 속한 사람과 교류가 많을수록 긍정적인 평가가 늘어나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 자신이 속한 집단은 인간적인 속성을 더 많이 나타내는 것으로 평가하는 반면 상대 집단은 비인간화(dehumanize)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심리적 본질주의(psychological essentialism)라는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다.*
이런 연구 결과는 서로 다른 집단, 특히 적대적 관계에 있는 집단 또는 고정관념과 선입견이 심하게 형성되어 있는 집단 및 그 집단에 속한 사람들과 직접 만나서 이야기 나누는 경험의 중요성을 시사한다.
‘난민’ 또는 ‘진보’, ‘보수’라는 한 단어로 정의된 그 집단에 그것 말고도 어떤 속성들이 숨어있는지, 그들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집단적 정체성만으로 정의될 수 없는 수많은 개인적 정체성을 가진 무수한 개인들은 어떤 모습을 하고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를 알아야 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나 역시 짧은 시간이었지만 난민들과 직접 만나서 함께 이야기 나누고 밥을 먹으며 그들의 삶을 나누고 알아가는 시간이 없었다면 난민에 대해 지금과 같은 관점을 가지지 못했을 것이다. 그들과 함께 보낸 시간을 통해 뉴스 속에서나 나오는 이야기, 나와 멀리 떨어진 지구 반대편에서 일어나는 일로만 여겼던 난민이 지금 내 옆에서 나의 이웃에게 일어나는 일로 느껴지는 인식의 변화가 일어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우리는 나와 다르다고 생각되는 사람일수록 더 만나고, 이야기 나눠야 한다.
* Everett L. Worthington, Jr. Forgiveness and Reconciliation : Theory and Application (New York: Routledge, 2006), p. 2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