뚜껑을 여는 순간 쉰 냄새가 확 올라온다. 황급히 도시락 뚜껑을 덮는다. 누가 봤을까 괜스레 얼굴이 화끈거리고 가슴이 두근거린다.
"왜 그래?"
같이 도시락을 먹는 친구가 물었다.
"속이 안 좋아서 오늘 밥 안 먹으려고,,,,,"
말끝을 흐리며 교실을 빠져나왔다.
아빠가 아프신지 두어 달 지났을까? 갑작스런 아빠의 입원으로 엄마랑 아빠는 병원과 공기 좋은 고모 댁을 오가며 지내셨고 며칠에 한번 집에 들르셨다. 고등학생인 언니는 버스를 타고 학교에 가기도 했고 등교시간도 이르다 보니 내가 졸지에 도시락 두 개를 매일 준비하게 되었다.
끼니마다 밥을 짓는 것은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니었다. 전기밥솥의 밥은 24시간은 기본 36시간을 훌쩍 넘기기 일쑤였고 그날도 언제 지었는지 모를 오래된 밥을 도시락에 그대로 넣었으니 그만 밥이 쉬어버린 것이다.
배가 고팠지만 속이 안 좋다고 거짓말을 한 탓에 매점에서 간식을 사 먹을 수도 없었다.
결국 그날 점심은 굶었다. 허기진 배를 달래며 집에 오니 언니가 텔레비전을 보며 거실에서 빵을 먹고 있었다. 테이블을 보니 빈 빵 봉지가 놓여있다.
"밥 쉬었더라? 뭐라도 먹었어?" 마지막 빵 조각을 입에 집어넣으며 언니가 무심이 물었다.
배고픔 때문이었을까? 혼자 빵을 다 먹어버린 언니에 대한 서운함이었을까? 아니면 한창 중2병을 앓을 나이에 갑자기 도시락을 쌀 수밖에 없던 상황에 대한 속상함이었을까? 갑자기 터진 눈물은 그칠 줄 몰랐고 서럽게 통곡하며 방으로 들어가 베개에 얼굴을 묻고 한참을 더 울었다.
울고 있는데 언니가 방문을 빼꼼히 열고 묻는다.
"빵 사다 줄까?"
대답이 없으니 다시 조용히 방문을 닫는다. 울다 지쳐 잠이 들었다. 얼마나 잤을까?
벌써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지 밖이 어슴푸레하다.
방 밖으로 나오니 언니는 학원을 갔는지 아무도 없다. 어둑어둑한 텅 빈 거실 소파에 오도카니 앉으니 쓸쓸함이 가슴에 스민다.
아빠가 아프다는 것만으로도 버거웠다.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도시락을 싸고 끼니를 챙기는 일은 한창 예민할 사춘기 시절의 나에게는 견디기 힘들었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말할 수 없었던 서러움이 그날의 쉬어버린 밥을 보는 순간 둑이 터지듯 툭 하고 넘쳐버린 것이다.
따듯한 가족의 밥상을 책임지던 엄마, 짜파게티만 끓여도 아빠들은 요리사가 되던 시절 치고는 꽤나 요리를 자주, 그리고 맛있게 해 주시던 아빠, 그렇게 행복했던 우리 가족이 그 쉬어버린 밥처럼 망가져 버린 것만 같았다.
더 이상 허기짐을 참을 수 없어 주방으로 걸어가 밥솥을 연 순간, 텅 비어 있어야 할 솥에는 하얀 쌀밥이 김을 모락모락 내며 달콤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식탁을 보니 데친 비엔나와 노란 포스트잇 한 장이 보인다.
´빵 혼자 먹어서 미안♡ 도시락 싸느라 힘들지? 우리 힘내자~밥 해놨어~´
윤기 나는 쌀밥을 한입 가득 퍼서 입에 넣었다. 뜨겁고 달콤한 밥이 입을 가득 채운다. 내 마음도 채운다.
아빠는 그 해를 넘기시지 못했다. 우리는 다시 그 즐거운 식탁에 네 식구가 둘러앉지 못했다. 비어있는 의자 때문에 한동안은 식탁에 앉는 것도 아팠다.
엄마는 일을 시작했고 언니도 다시 마음을 다잡고 공부를 시작했다.
비어있는 의자를 채울 수는 없지만 우린 각자의 자리에서 흔들리는 가족을 위해 묵묵히 나아갔다.
그날의 쉬어버린 밥이 흔들리는 우리 가족의 모습 같아 나를 아프게 했지만 언니가 해놓은 따뜻한 밥이 나를 위로하며 안아주었듯, 나도 우리 가족의 마음에 위로가 되고 싶었다. 늦은 밤 일하고 돌아오는 엄마를 위해, 공부하고 돌아오는 언니를 기다리며 나는 따뜻한 밥을 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