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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루아 Oct 03. 2021

바나나 한 개?

푸드에세이

바나나를 한 송이 사면 꼭 한 두 개가 남아 거뭇하게  변한 애물단지가 되곤 한다.
입이 짧은 아이들은 처음 몇 개는 맛있다고 먹는데 금세 지겹다고 다른 과일 없느냐고 묻는다.
경상도 사람인 남편 표현에 따르면 포시라워서 그렇단다.
거뭇거뭇한 반점이 피어오르는 바나나를 버릴까 고민하다 문득 돌아가신 할머니 생각이 났다.
할머니는 내가 대학에 입학한 그 해 벚꽃이 만개한 봄에 돌아가셨다.
고3 때는 공부한다고, 대학 입학하고는 노느라 바빠서 아프신 할머니를 자주 찾아뵙지 못했다.
소식을 듣고 황급히 병원으로 갔지만 임종도 지키지 못했다.
장례를 마치고 정리할 게 있다는 엄마를 따라 할머니 집에 갔는데 옆집 할머니가 아는 체를 하셨다.
기억에 없는데 날 아시는 걸 보니 어렸을 때 잠시 할머니와 같이 살았던 그때부터 이웃에 사시던 분 인가보다.
" 아유~왜 이렇게 안 왔어. 얼마 전 내가 바나나 몇 개 먹으라고 가져다 주니 막내 손녀가 좋아하는 거라고 안 먹고 챙겨놓던데,,, 결국 못 줬네"
눈물이 그렁그렁한 나를 보고 사촌오빠가 그런 말씀은 뭐하러 하시냐고 타박을 했다.
그 바나나인지 할머니의 냉장고에는 검게 변한 바나나 한 개가 쓸쓸히 놓여 있었다.
사실 나는 바나나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데,  지금도 가족들이랑 농담 삼아 이야기하는 일명 " 바나나 사건" 때문에 할머니는 내가 바나나를 좋아한다고 생각하셨다.
내가 국민학교도 들어가기 전, 그때 우린 할머니랑 같이 살았다. 할머니 집은 옛날식 ㄷ자 형 집으로 한가운데 대청마루가 있었다.
녹아내릴 듯 뜨거운 한여름의 뙤약볕을 피해 대청마루에 누워 낮잠을 자고 있는데, 한 살 터울의 언니가 날 흔들어 깨웠다.
"일어나 봐~빨리빨리."
뒷목을 살랑살랑 간지럽히는 선풍기 바람을 느끼며 기분 좋게 잠에 취해있던 나는" 아~왜~."하고 볼맨 소리를 내다가 "아빠가 바나나 사 오셨어." 하는 소리에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때, 바나나는 자주 먹을 수 있는 과일이 아니었다. 송이로 사는 건 상상도 할 수 없었고 가~끔 낱개로 사주곤 하시는 귀한 과일이었다.
"근데 한 개야. 나눠먹자"
언니가 노랗고 길쭉한 바나나 한 개를 쑥 내밀었다.
노란 껍질을 쓱쓱 벗겨내자 하얀 속살이 드러났다. 침이 꼴깍 넘어갔다.
언니가 정확히 반으로 나눠준 바나나를 순식간에 먹어 치우고 손가락과 입술에 묻은 것까지 쪽쪽 빨아먹었다.
입맛을 다시며 언니가 바나나 먹는 걸 물끄러미 바라보는데 나를 힐끗 쳐다보는 언니의 표정이 묘했다.
´한입 주려고 그러나?' 기대해 보지만 남은 바나나는 이내 언니 입 속으로 자취를 감추고, 아쉬움을 털어내며 일어서는데,
"근데,,,,"

언니가 말끝을 흐렸다.
"왜?"
"화 안 낸다고 약속하면 말해줄게"
고민해 보지만 항상 그렇듯 궁금함이 이겼다.
"알겠어, 화 안 낼게. 약속!"
"진짜지?"

몇 번이나 다짐을 받고서야 언니는 말을 꺼냈다.
"사실은,,, 아빠가 바나나 두 개 사 왔어. 내가 한 개 먼저 먹었어."
하고는 냉큼 덧붙인다. " 화 안내기로 했다."
화가 나는데 화를 못 내니 애먼 발만 동동 구르며 씩씩거렸다.
눈치를 보니 엄마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웃음을 참는 기색이 역력했다.
엄마까지 한 편이라 생각하니 더 서러웠다.
급기야 할머니한테 쪼르르 달려가 미주알고주알 일러바쳤다.
생각해보면 할머니라고 왜 몰랐겠는가 만은, 사촌들이랑 적게는 다섯 살, 많게는 열 살 넘게 터울이 지는 막내 손녀에 대한 할머니의 사랑은
지극했기에, 나는 할머니만은 내 편이라 철썩 같이 믿고 그 품에 안겨 서러운 눈물을 뚝뚝 흘렸다.
"아이고 내 강아지를 누가 울렸나,,, 할머니가 엄마랑 언니 혼내줘야겠네."
엉덩이를 토닥여 주시며 괜히 큰소리를 내셨다.

"애미야 내일 당장 바나나 사줘라."
바나나를 다음날 사주셨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나이를 먹고는 상큼함과 시원한 맛은 전혀 없고 달콤함만 가득한 바나나를 더 이상 좋아하지 않았지만, 할머니는 내가 찾아가면 바나나를 자주 사놓곤 하셨다.
그렇게 귀한 대접을 받던 바나나가 이제는 먹다 지쳐 남는 흔하디 흔한 과일이 되었다. 괜스레 할머니 생각을 하니 마음이 몽글몽글해져 검게 변한 바나나는 버리지 않기로 했다.
보글보글 끓는 돈까스 소스에 으깬 바나나를 넣으면 부드럽고 윤기도 더해진다고 한다.
카레에 바나나를 넣으면 달콤하고 이국적인 카레가 된다고도 한다.
오늘 저녁은 카레를 먹을지 돈가스를 먹을지 고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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