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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루아 Nov 20. 2021

첫사랑

한없이 가벼운 나의 첫사랑

  문을 열자 참았던 눈물이 터졌다. 나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정성껏 준비한 초콜릿 바구니를 냅다 집어던지고 방으로 쏙 들어갔다.

"초콜릿 전해줬어?"

언니가 방문을 빼꼼히 열고 묻는다.

 도로 가져온 초콜릿을 뻔히 보면서  묻는 것도 얄미운데 먹어도 되냐며 약 올리듯 바구니를 뒤적이는 언니 손에서 바구니를 홱 빼앗아 방으로 가지고 들어왔다.

  집에 올 때에는 당장 쓰레기통에 쳐 넣으리라 굳게 결심했건만, 막상 버리려고 하니 몇 번 먹어보지도 못한 페레로로쉐 초콜릿이 눈에 밟혔다. 길리안 초콜릿은 부드럽게 혀에서 살살 녹는다던데,,, 눈물을 훌쩍이며 초콜릿을 한 개씩 까먹다 보니 혀에 녹아내리는 초콜릿과 함께 서러운 마음도 어느새 녹아내렸다.

  그날은 내가 초콜릿을 준비한 첫 발렌타인데이였다. 열다섯 살의 내가 다니는 중학교는 남녀 공학이었지만 남자는 홀수반, 여자는 짝수반으로 나뉘어 있었다. 한창 호기심이 왕성할 나이의 아이들은 나누는 것도 아닌, 그렇다고 같이 어우러지는 것도 아닌 애매한 경계에 서로에 대한 환상만 키워갔다. 자연스러운 남사친, 여사친을 꿈꿨지만 현실은 서로 소 닭 보듯 지나치며 곁눈질로 속닥거리고 낄낄대기만 했다.

  내가 마음에 두었던 그 아이는 바로 옆 반에서 가장 키가 큰 남자아이였다. 나는 그 애의 성격도, 취미도  알지 못했다. 심지어 말 한마디 주고받은 적도 없었다.  그냥 학교에서 오가며 얼굴만 알았는데 어느 날부터 그 애가 내가 다니던 학원에 다니게 되었다. 학원에서 '어? 우리 학교 애네?'하고 한 번 보고, 학교에서 '어? 우리 학원 다니는 애네?'하고 한번 더 보고, '아, 쟤 우리 옆반이구나." 하고 또 한번 보고.  그렇게 몇 번을 자꾸 보다 보니 자연스레 관심이 생겼나 보다.

체육시간에 체육을 싫어하는 친구들과 모여 그늘에 앉아 수다를 떨고 있을 때였다. 그날의 수다는 여느 때와 같이 남자 이야기로 흘러갔다. 누구는 어느 학교 누구랑 사귄다더라, 누구 남자 친구는 20살 대학생이라더라 하며 새로운 소식을 퍼 나르던 친구가  문득 물었다.

  "야! 넌 우리 학교에서 누가 젤 괜찮은 거 같아?"

  "어,,, 난 별로,,, 잘 모르겠는데?"

  내 대답이 영 시원치 않았는지 친구들이 날 채근했다.

  " 야~그러지 말고 말해봐. 그래도 좀 관심 있는 애 있을 거 아니야~"

  누구라도 말해야 할 것 같은 분위기에 나는 열심히 머릿속은 헤집어 보았다.  그때 그 아이가 떠올랐다.

   " 어,, 그 3반에 키 큰 애."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아이들이 내 어깨를 치며 까르르 웃는다.

  "진짜? 나 걔 알아. 걔 김태완 말하는 거지?"

  "기집애 너 걔 좋아했구나?"

나는 그렇게 그 애를 좋아하게 되었다. 입 밖으로 말을 하고 나니 정말 그 애를 좋아하는 것 같았다.  운동장이나 복도에서 눈으로 그 애를 찾았고, 혹시나 눈이 마주치면 가슴이 뛰었다. 그 애가 복도에서 옆으로 스쳐 지나가기라도 하면 얼굴이 붉어지고 가슴이 콩닥거려 표정관리를 해야 했다. 그 애는 우리 반에서 공식적으로 내가 좋아하는 애가 된 덕분에 다른 아이들은 그 애를 좋아할 수 없었다. 그 애와 나는 정작 아무 사이도 아니었지만 반에서는 그 아이에 대한 나의 암묵적인 소유권이 인정되었다. ' 그 애를 좋아할 수 있는 권리'  친구들은 참새처럼 그 애의 정보를 물어왔다. 어느 아파트에 살고, 누나가 있고, 어느 초등학교를 나왔고  여자 친구는 없다고 했다. 가장 친한 친구는 그 반에서 두 번째인지 세 번째인지로 키가 작은 아이였다. 둘은 항상 어깨동무를 하고 다녔는데 키 차이 덕분에 마치 형과 동생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가 빅뉴스를 물고 왔다. 3반 남자애들  몇 명이서 서로 좋아하는 여자애 이름을 책상에 적었는데, 그 남자애들 중 한 명이 내가 좋아하는 그 아이 '김태완'이었고, 책상에 적힌 여자애들 이름 중에 내 이름이 있다는 것이었다. 친구들은 당연히 그 이름을 적은 게 그 아이일 거라고 했다. 다들 책상을 두드리고 환호성을 부르며 나를 축하해 주었다.

  "야~아니야. 누가 적었는 줄도 모르잖아~"

그렇게 말하면서도 내 얼굴에는 함박 미소가 걸렸다. 그 애 일지도 모른다는 기대와 누구이든 상관없이 나를 좋아하는 애가 있다는 설렘, 둘 중 어느 것이 날 더 들뜨게 했는지는 모르겠다.

  친구들의 설레발에 나는 야심차게 고백을 준비했다. D-day는 바로 다가오는 발렌타인데이! 바구니를 사고, 바구니에 넣고 꾸밀 초콜릿, 사탕, 작은 리본, 끈, 포장지 등을 사느라 없는 용돈을 쪼개고 또 쪼개야 했다. 며칠간 떡볶이도 마음껏 못 사 먹었지만 마음만은 행복했다.

 드디어 나 만큼이나 친구들도 기대하던  발렌타인데이날이 밝았다. 땡 하고 수업이 마치자마자 친구가 그 애 반으로 염탐을 갔다. 하교 후 바로 그 애 반으로 가서 초콜릿을 전해주려는 게 우리의 계획이었다.

  "야, 걔  벌써 집에 갔데."

  어쩜 그렇게 계획도 없이 무대포였는지 지금 생각하면 한심하기 짝이 없다. 그 애 연락처도 모르고, 미리 약속도 안 잡았으니 우리 반보다 일찍 종례가 끝난 그 아이는 벌써 집에 가버린 것이었다.

  계획성은 없어도 근성은 있었는지 우린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친구 집에 가서 그 애랑 같은 초등학교를 나온 아이들에게 전화를 걸어 혹시 걔네 집 전화번호를 아는지 물었다. 몇 번의 시도 끝에 그 애의 집 전화번호를 손에 넣었다. 당시에는 휴대전화는 커녕 삐삐도 없기에 우린 누가 받을지 모르는 집으로 전화를 했다.

뚜르르르, 뚜르르르 몇 번의 신호음이 울린 후 누군가 전화를 받았다. 다행히 그 애였다.

 " 여보세요."

  "누구세요?"

  "나,,2반에  ooo인데 혹시 나 알아?"

  "어."

  짧은 대답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아,, 진짜? 나 어떻게 알아?"

  내 질문에 그 애는 약간 망설이는 듯했다. 짧은 망설임 끝에 그 애의 입에서 나온 말은 충격적이었다.

  " 내 친구 oo이가 너 좋아해서."

   망치로 머리를 맞은 듯 멍해진 나는 순간 말을 잃었다. oo는 그 애랑 늘 붙어 다니는 그 키 작은 남자애였다.  충격 속에서도 이왕 전화한 거 끝장을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 나 줄 거 있는데, 혹시 오늘 시간 있어?"

  내 물음에 그 애는 잠시 말이 없었다. 어색한 침묵이 몇 분이나 흘렀을까?

  " 아니, 없어,,, 끊을게."

   뚜뚜뚜 신호음이 들리는 전화기를 붙잡고 망연히 서 있던  나는 전화기를 내려놓고 친구에게 기대어 엉엉 울었다. 그 길로 집에 돌아와 초콜릿을 몽땅 먹어버렸다. 한차례의 눈물바람이 지나가고 다음날이 되니 남은 건 아픔보다는 부끄러움과 민망함이었다. 한 동안 그 애랑 마주칠까  피해 다닌 기억이 난다. 학원도 그만두었던 것 같다. 분위기에 취해 쉽게 시작한 첫사랑이어서였을까? 생각보다 아프지도 슬프지도 않았다. 며칠 지나고 나니 나를 좋아한다는 그 애의 키 작은 친구에게 관심이 갔다.  자세히 보니 얼굴도 꽤 귀염상이었다  화이트데이에 너한테 고백할 거래. 친구들은 또 참새처럼 그 애의 소식을 물어왔다. 어찌 된 영문인지 그 애는 결국 나에게 고백을 하지 않았다. 아마도 친구에게 발렌타인데이 에피소드를 전해 들었던 게 아닐까? 한없이 가벼운 나의 첫사랑  소동은 그렇게 허무하게 지나갔다. 이십 년이 넘어가는 지금도 그 애의 이름을 기억하는 것은 그 애가 내 첫사랑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처음 준비한 발렌타인데이 선물을 전해주지 못한  아쉬움 때문일까? 알 수는 없지만 날 좋아했던 아이의 이름은 기억이 안 나는 걸 보면  열다섯 살의 소녀가 품을 수 있는 만큼의 연정은 진심이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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