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만족과 갈등의 미학
“예술가에게 불만족은 불치병이고, 만족은 죽음이다.”
이 문장은 예술가가 왜 늘 갈증과 모험 사이를 헤매는지 압축해 보여준다. 예술가는 한편으로 자신의 ‘스타일’을 통해 인정을 받고, 대중은 그 스타일에 익숙해지면서 “역시 ○○답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동시에 예술가 스스로는 “이 스타일이 너무 굳어버린 건 아닐까?”라는 불만족을 느끼고, 한 걸음 더 나아가기 위해 스타일을 파괴·재구축하려는 갈증을 안고 살아간다.
바흐, 모차르트, 베토벤, 드뷔시, 에릭 사티 등 음악가를 예로 들어보면, 그들의 작품엔 고유한 작곡 언어가 묻어난다. 예컨대, 바흐의 대위법, 모차르트의 균형미, 베토벤의 드라마적 전개, 드뷔시의 인상주의적 화성, 사티의 엉뚱하고 간결한 터치가 있다.
청자가 느끼는 ‘익숙함’
이를 듣고 “아, 이건 딱 베토벤 느낌이네!”라며 금세 알아채는 순간이 있다. 이 익숙함이 곧 작가에게는 ‘나만의 색깔’을 확립한다.
이렇듯 스타일은 예술가를 “유일무이한 존재”로 만들어주는 무기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작가는 “내가 자가복제를 하고 있는 건 아닐까?”라고 스스로 의심하게 된다.
안주하는 위험
이미 시장과 청자가 사랑해주는 ‘독특함’을 유지하는 것이 안정적이지만, 예술적 도전 정신은 “이대로라면 내가 고여버리지 않을까?”라는 불만족을 낳는다.
예술가가 “아, 이 정도면 완벽해”라고 완전히 안주하는 순간, 더 이상의 탐색과 발전이 끊긴다. 이는 실질적 창작적 사망이라 할 수 있다.
바흐부터 피카소까지
바흐는 종교음악 대가로 불렀음에도 끊임없이 형식적 실험을 멈추지 않았고, 피카소도 시기를 달리하며 전혀 다른 화풍을 펼쳐 보였다. 그들이 “내 양식은 이것뿐”이라고 만족했다면, 작품 세계가 한정되었을 것이다.
예술가가 가진 근원적 불만족은 “더 새롭고, 더 깊은 무언가”를 지향하게 만든다. 바로 이 불만족이야말로, 창작의 원동력이 된다.
갈증의 미학
예술가들은 완성된 작품을 보고도 “좀 더 다르게 표현했어야 했는데…”라고 자책한다. 이 갈증이 없으면, 스타일은 정체되어 무의미한 반복만 남게 된다.
예술가는 “얼마나 나의 스타일을 극복할 것인가”를 고민한다. 칸딘스키, 달리, 피카소, 고흐, 모네, 마네 등 수많은 미술가를 보면, 한 시기에 정착한 스타일에서 만족하지 않고, 계속 변주와 모색을 감행했다.
작가 내면의 싸움
이미 인정을 받고 있는 양식이 있음에도, “새로운 기법·관점”을 시도해 기존 팬들을 놀라게 하거나, 심지어 반감을 사기도 했다.
스타일을 깨려는 시도는 위험한 모험이다. 대중과 비평가가 등을 돌릴 수 있고, 실패할 가능성도 크다. 하지만 이러한 모험이 없으면 ‘예술가의 진화’도 없다.
갈등의 본질
“나만의 성(스타일)을 허무는 게 옳을까?”라는 의문이 예술가를 괴롭힌다. 그러나 과감히 허물고 재구축하는 과정이야말로 예술가를 살아 숨쉬게 한다.
베토벤은 초기·중기 작품에서 이미 찬사를 받았지만, 후기 현악사중주에선 매우 파격적이고 실험적인 화성을 내세웠다. 어떤 청자들은 “너무 난해하다”고 느꼈으나, 후대에 이 작품들은 위대한 혁신으로 재평가되었다.
청색시대, 장밋빛시대, 입체파 시기 등, 피카소는 끊임없이 자기스타일을 깨부수고 새 양식을 시도했다. 덕분에 20세기 미술의 거대한 변혁을 이끌었다.
“예술가에게 불만족은 불치병이고, 만족은 죽음이다.” 스타일은 예술가의 아이덴티티이자, 동시에 자칫 나태와 자가복제를 부추기는 족쇄가 될 수 있다.
균형점 찾기
예술가는 자신의 독창적 색깔을 너무 쉽게 버리면 정체성을 잃을 수 있고, 반면 유지하기만 하면 퇴행할 위험이 있다. 이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하는 과정, 즉 “내가 구축한 것을 어느 정도까지 깨고, 또 어떻게 살려야 하는가”가 창작의 본질적 고민이다.
끝없는 여정
결국, 예술가의 여정은, “내 스타일을 지키면서도 새로움을 어떻게 불어넣을 것인가?”라는 질문을 평생 품고 달리는 형태가 된다.
이렇게 보면, 예술은 끊임없는 모순과 싸움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바로 그 불만족이 새로운 문을 열고, 조금씩 자신을 깨면서도 ‘나’답게 진화해가는 것이 예술가의 진정한 생명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