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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퍼플슈룹 Aug 09. 2023

선생님이 웃고 있어서 괜찮은 줄 알았어요.

학부모에게 웃으며 거절하는 방법 있을까?

“오늘 센터장님 안 계세요? 내가 센터장님이 보고 싶어서 왔는데”


오늘도 찾아온 K아빠.

올 때마다 간식거리를 들고 온다. 좋은 마음으로 간식을 들고 오는 학부모에게 화를 내기란 쉽지 않다. 간식만 들고 온다면 무엇이 문제일까? 늘 술을 마시고 왔다. 그리고 꼭 나를 찾는다. 아빠가 왔다고 좋아하는  K 앞에서 화를 낼 수 없어서 웃으며 이야기를 나눴다. 시간이 지날수록 방문 횟수가 잦아지고, 늘 만취 상태였다. 더는 두고 볼 수 없어서, 이날만큼은 끝장을 보겠다는 마음으로 단호한 투로 말했다. 


“아버님! 아이들 예뻐하는 마음으로 간식 사 주시고, 저희를 잘 봐주셔서 너무 감사해요. 그런데 이곳은 아이들이 있는 곳이에요. 어떻게 오실 때마다 술을 드시고 오세요. 정말 불편합니다. 그리고 K한테도 교육상 좋지 않습니다. 술 드셨으면 바로 집으로 가시는 게 좋겠어요.”

말하고 나니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내 말을 들은 아빠의 표정이 바뀌었다. ‘술을 마셨기 때문에 돌변할 수 있다’, ‘혹시 저녁에 다시 찾아와서 난동을 부릴 수 있다’ 수많은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의외로 K아빠는 나에게 정중하게 사과했다.


“정말 미안합니다. 선생님이 그렇게 생각하는지 몰랐어요. 다음부터 술 마시고 오지 않을게요” 예의 바른 태도에 놀랐지만, 안심했다. 나도 화내서 죄송하다고 말하고 상황이 끝났다. 물론 이 과정을  K가 모두 봤다. K에게 이 상황을 어떻게 말해야 할지 난처했다. 교실로  K를 불러 솔직하게 말했다. “선생님이 아빠한테 화내면서 말하는 거 보고 놀랐지? 놀라게 해서 미안해. 아빠가 선생님들에게 잘해주시는 거 너무 감사하고 좋아. 그런데 술 마시고 센터에 오시는 건 옳은 행동이 아니야. 아빠가 놀라셨겠지만, 선생님이 오랫동안 참다가 말한 거야.” 내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K가 말했다. 

“죄송해요. 선생님. 아빠가 술 마시고 오는 건 저도 싫어요. 그래서 하지 말라고 말하는데 제 말을 들어주지 않으세요. 죄송해요. 그런데 저는요, 선생님이 웃고 있어서 괜찮은 줄 알았어요.” K의 말이 나를 정신 차리게 했다.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면 좋겠다고 입버릇처럼 아이들에게 말했는데, 내 행동이 오히려  K를 혼란스럽게 했다. 사실, 내 행동엔 이유가 있었다. 






 K는 나에게 아픈 손가락과 같다.  K는 라푼젤처럼 긴 머리카락,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아낼 것 같은 큰 눈망울을 가진 아이는 한국 아빠와 필리핀 엄마 사이에서 태어났다. 부모님은 맞벌이였고, 퇴근이 매일 늦어서 K가 혼자 있는 시간이 길었다. 그래서 지역아동센터에서 돌봄을 받을 수 있게 됐다. 엄마는 한국에 십 년 넘게 살았지만, 한국어로 의사소통이 불가했다. 더군다나 아빠는 한글을 읽고 쓸 수 없었다. 부모 중 한 명이라도 제대로 된 소통을 하는 것이 시급했다. 그래서 아이 엄마에게  K를 위해서라도 한글을 배우는 것이 좋지 않겠냐고 말했지만, 의지가 없었다. 그저 남편이 매일 술 마시고 와서 답답하다는 말만 늘어놨다.  K는 필리핀 말을 감으로 이해했고,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 필리핀 말로 엄마와 대화를 했다. 대화가 통하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이런 환경에서 자란  K가 말은 하지만, 조리 있게 전달하는 것이 어렵고, 상대방의 말을 이해하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특히 낯가림이 심해서 센터 적응이 어려웠다. 말을 걸어도 대답도 안 하고, 혹시 대답해도 목소리가 작아서 못 알아듣기도 했다. 그래서 재차 물어보면 눈물을 흘렸다. K를 이해하는데 몇 달이 걸렸다. 


부모님과 면담하고,  K와 시간을 보내며 가정 내 상황을 파악했다. 무엇보다  K가 자립할 수 있게 도움을 주는 것이 먼저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K에게 맞는 서비스를 제공하기 시작했다. 월에 1번 발행되는 가정통신문에는 각종 행사, 캠프, 준비물, 동의서 전달사항이 담겨있다.  K네 집에서 가정통신문 내용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에  K를 훈련시켜야 했다. 가정통신문이 나가는 날에는  K를 따로 불러서 한 문장씩 읽어주고, 꼼꼼하게 설명했다. 그리고  K가 이해했는지 여러 차례 확인했다. 메모하며 열심히 노력하는  K를 보면서 더 천천히 꼼꼼하게 설명했다. K는 학교 수업을 따라가기가 어려웠다.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했다. 문해력을 키우기 위해 다른 어린이들보다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기다렸다. 이런 우리의 노력이 통했는지  K는 공부에 재미를 붙여 열심히 했다. 


K는 어느 날 이런 말을 했다. "지금까지 자기에게 상황을 자세하게 이야기해 주는 사람도, 기다려주는 사람도 없었는데, 센터 선생님들이 그렇게 해줘서 너무 감사해요"  K의 진심이 물씬 담긴 말이었다. 

“시간이 오래 걸리는 건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아. 누구에게나 자기만의 방법이 있는데,  K는 지금 그 방법을 찾아가는 중인 거야. 늦다고 조급해하지 말고, 차근차근해 나가면 되는 거야. 선생님들이 옆에서 도와줄게. 포기하지 않고 함께 해줘서 고마워.” 나도 마음을 전했다. 


엄마를 쏙 빼닮은 예쁜 딸을 애지중지 키우는 아빠에게  K는 센터가 좋다고 말했다. 아빠가 우리에게 잘하는 건 인지상정이었다. 그래서 나는  K아빠 행동을 참았고, 고치길 기다렸다. 그러나 절대 불가하다는 것을 깨닫고 방법을 바꿨을 뿐이다. 이후 한 달간 아빠는 찾아오지 않았고, 어느 순간부터 미리 전화하기도 했다. 아주 가끔 술 마시고 센터를 찾아오기도 했지만, 나를 찾지도 않고 간식만 주고 가버렸다. 노력해 줘서 고맙다는 표현도  K아빠에게 말했더니 더 열심히 노력해 줬다. 






사회복지사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 즉 클라이언트에게 서비스를 제공한다. 그래서 무엇보다 클라이언트와 관계가 중요하다. 지역아동센터에 근무하는 나에게 클라이언트는 어린이와 그 부모였다. 그들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찾고, 적절한 서비스를 제공한다. 서비스의 기본이 진심과 친절이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진심과 친절이  K 마음을 움직인 것처럼, 집에 가도 아내와 나누지 못했던  K아빠는 센터에서 마음을 나누고자 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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