넉살 좋고 말주변이 좋은 S는 또래에 비해 덩치도 크고, 서글서글한 인상 덕분에 이목을 집중시키는 데 언제나 성공했다. 그러나 목소리가 크고, 말이 많고 시끄럽다. 분위기를 편안하게 만든다는 큰 장점도 있지만, 정도가 지나쳐 친구들이나 어른들에게 핀잔을 듣기 일쑤였다. 싫은 소리를 들어도 정 많고 관심받는 것을 좋아하는 시호는 언제 그랬냐는 듯 쪼르르 달려와서 무리에 합류한다. 도저히 미워할 수 없는 어린이었다.
언제나 밝고 에너지 넘치는 S는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를 품고 산다. 그 수수께끼의 주인공은 바로 아빠다. 나도 그 수수께끼가 풀리지 않아 추리만 늘어놓았는데 할머니와 이야기를 나누고 한 번에 해결됐다. 그러나 S가 아직 어리다고 판단한 할머니는 S에게 사연을 좀처럼 털어놓지 않으려 한다.센터에 도착하면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늘어놓느라 바쁜 S가 그날따라 잔뜩 풀이 죽고 의기소침한 모습이었다. 분명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은데, 얼마나 많은 말을 쏟아낼지 몰라서 선뜻 물어볼 수 없었다. 내가 S 옆으로 다가가 머리를 쓰다듬으며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었다.
“선생님, 우리 아빠는 나를 미워하는 것 같아요. 동생만 예뻐해요”
S는 오늘도 아빠 얘기를 시작했다. 그냥 위로만 하고 넘어갈 수 없는 문제다. 할 수 없이 이야기를 더 들어야 했다. 부모님과 동생과 외식을 했는데 아빠는 동생만 챙겨줘서 서운한 마음에 아빠를 바라봤지만, 아빠는 동생만 신경 썼다.S는 섭섭한 심정으로 고개를 숙이고 밥을 먹었다고 했다. 이 모습을 본 엄마가 음식도 건네주고 챙겼지만충분하지 않았다. 식사하는 내내 불편했던 마음을 나에게 전했다.
“선생님, 저는 동생을 예뻐해요. 저보다 많이 어려서 제가 잘 챙겨줘요. 그런데 아빠가 동생을 더 챙겨주라고만 해요. 이미 잘 챙기고 있는데요. 아빠는 동생만 예뻐해요. 반찬 먹을 때 맛있는 거 있으면 동생만 주고, 저는 챙겨주지 않아요. 그래서 가끔 동생이 밉기도 해요. 그리고 중요한 건 아빠는 동생이랑 살고 나랑 살지 않아요.”
목 끝까지 차오르는 말, '그 사람 네 친아빠 아냐!'
S 말대로 동생은 부모와 살고, S는 조부모와 살고 있다. 분명히 이상한 구조다. 자세한 얘기를 할머니에게 전달받고 모든 걸 이해했다. 엄마는 집을 나와 동거하면서 S를 낳았으나 얼마 가지 못하고 남편과 헤어지게 됐다. 혼자 S를 키울 형편이 되지 않자 다시 친정으로 들어가서 살게 됐다. 시간이 흘러 지금의 남자를 만나 동거를 시작했고 S 동생을 낳았다. 지금 남편이 S를 예뻐하지 않고, 오히려 싫은 티를 내서 어쩔 수 없이 따로 살고 있었다. 이 상황을 전혀 모르는 S는 자신은 그저 아빠에게 미움받는 불행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할머니가 말하기 불편하면 엄마가 직접말해도 되지 않겠냐고 물었다. 그러나 S엄마는 남편 심기를 건드리고 싶어 하지 않고, S와 새아빠가 마주치는 일을 만들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중이라고 했다. 엄마는 S와 함께 살지 못해서 미안한 마음에 용돈을 넉넉하게 주고, 여행도 가끔 간다고 했다. 채워지지 않는헛헛함을 돈과 여행으로 채울 수 있을까?
할머니에게 엄마를 만나야겠다고 말했다. 절대 만나면 안 된다고 나를 말렸다.
“할머니, 엄마가 안 되면 할머니가 이 사실을아이에게말하면 어떨까요? 물론 아직 어리지만, 4학년이니 이해 못 할 만큼 어린것도 아니에요. 오히려 솔직하게 말하면 엄마에 대한 서운함, 아빠에 대한 미움, 동생에 대한 죄책감을 덜 수 있어요. 아이가 무척 혼란스럽고 괴로워하고 있어요. 이건 어른들이 풀어줘야 해요.”간절하게 부탁했다. 돌아오는 답변은 내 기대와 달랐다.
“절대 안 돼요! 지금 S한테 알리면 큰일 나요. 나중에 커서 자연스럽게 알면 모를까. 사실은 S가 죽을 때까지 새아빠라는 사실을 모르고 살았으면 좋겠어요.”
무책임했다. S는 아빠로부터 미움받는 ‘세상에 필요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부모로부터 차별받고 있다는 불안감을 안고 힘겹게 살아가고 있는데 사실을 숨기기에 급급하다니 말도 안 됐다. 언젠가 무너질 일이다. 적당한 시기를 봐서 솔직하게 이야기하면 처음에 충격일 수 있지만, 아빠의 태도를 이해하고 자신을 갉아먹는 일은 하지 않을 것이라고 할머니를 다그쳤다. 그리고 기다렸다. 하루, 이틀, 일주일, 보름. 할머니는아이에게말하지 않았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마음의 상처는 깊어져 가고 있다. 물론 솔직하게 말하는 것이 나을지, 죽을 때까지 모른 척 덮어두는 것이 맞을지 나도 장담할 수 없다. 그러나 이것만은 알고 있다.
부모에게 아이가 솔직하게 말하길 바라는 것처럼
아이도 부모가 자신에게 솔직하길 바란다는 것을.
어른은 어린이가 생각의 깊이가 짧고, 어른의 세상을 이해 못 한다고 치부한다. 그러나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어린이는 어른보다 마음이 넓고 생각이 깊다. 언제나 부모만 사랑하고 이해할 준비가 되어 있다. 늘 부모 편에 서 있다. 그래서 자신들에게 솔직하게 말해주길 바란다. 어른은 어린이가 이해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솔직하게 마음을 터놓는다면 훨씬 더 돈독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음을 절대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