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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퍼플슈룹 Aug 12. 2023

내가 지켜줄게.

믿을만한 어른

“내 딸 어딨어? 당신이 뭔데 딸을 못 만나게 하는 거야? 어!!”

센터 문이 벌컥 열렸고, 누군가 소리를 지르며 안으로 들어왔다. K 아빠였다. ‘올 것이 왔다.’ 언젠가 마주할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막상 그 순간이 찾아오니 심장이 덜컥했다. 


따뜻한 봄날 K와 만났다. 4학년인데 또래에 비해 성숙한 말투와 배려하는 행동이 인상적이었다. 나무랄 데 없이 자기 관리도 잘했고 리더십도 있어서 친구들과 동생들을 잘 이끌었다. 한 마디로 장점이 많은 친구였다. 조금만 길을 내어주면 혼자서도 잘하는 K에게 가장 큰 걸림돌은 아빠였다. 아빠는 강압적이고 자기 멋대로였다. 키를 더 키워야 한다며 매일 아침 1리터의 우유를 먹였다. 엄마도 말릴 수 없었다. K는 반항을 꿈도 꿀 수 없었다. 


어느 날 센터에 와서 배가 아프다고 호소해서 물어보니 “선생님, 우유를 급하게 많이 먹어서 탈이 났나 봐요. 학교에서부터 배가 아팠어요.” 부모의 그릇된 생각이 아이를 구렁텅이에 빠뜨리고 있었다. 마음이 퍽 아팠다. 엄마와 통화해서 상황을 전달했고, 집에서 쉬게 했다. 무더운 여름 K와 나란히 앉아서 공부하고 있었다. 그런데 K가 허벅지를 계속 만지고 있었다. 표정을 보니 아픔을 참고 있었다. 무슨 일이냐고 물었는데, 우물쭈물하는 모습이 이상해서 반바지를 살짝 올려봤다. 시퍼런 멍이 보였다. 정말 교묘하게 바지선 위 허벅지를 때려서 바지를 들치지 않으면 전혀 알 수 없었다.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었는데, 아빠에게 말대꾸를 해서 맞았다고 했다. 말문이 막혔다. 약을 발라주며 우는 K를 달랬다. 먼저 엄마에게 면담을 요청했다. 상황을 물어보니, 아빠가 훈육 차원에서 한 일이라고 말했다. 훈육인데 멍이 들 때까지 때리는 건 잘못된 일 아니겠냐고 묻자, 남편에게 그렇게 하지 말라고 말했지만, 본인도 남편이 무서워서 저항하기 어렵다고 했다. 얼마나 자주 이런 일이 있는지, 가정 내 다른 폭력은 없는지 이것저것 물었다. 엄마는 뭔가 숨기는 듯했다. 내가 이 상황을 주시하고 있고, 한 번 더 이런 일이 일어나면 조치를 취하겠다고 말한 후 엄마를 돌려보냈다. 


다행히 그날 이후 아이에게서 어떤 특이사항이 발견되지 않았다. 또 내가 마음을 놓을 수 있었던 장면이 있었다. 시장에서 만난 아빠를 K가 “아빠”하며 달려가 안기는 모습을 보고 안심한 부분도 있었다.






세월이 흘러 K는 중학생이 됐고, 별일 없이 잘 지내고 있던 어느 날 일이 터지고 말았다. 아이들 모두 보내고 업무 마무리를 하고 있던 저녁 시간, “선생님” K 목소리였다. 현관으로 나가보니 K 엄마가 여행용 가방과 짐을 싸 들고 센터 앞에 서 있었다. 심상치 않음을 느꼈고 모녀를 센터 안으로 들어오게 했다. 혹시 밖에서 보일까 봐 교실 불도 켜지 않은 채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머니”


의연한 엄마 모습을 보며 나도 긴장하며 이야기를 들었다. 남편의 폭력적인 언행은 여전했고, 견디다 못해 간단한 짐만 챙겨서 집을 나왔다. 그동안 엄마는 경제활동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무일푼으로 나왔다. 당장 갈 곳도 없어서 수소문해서 친척 집에서 잘 수 있게 됐다. 짐을 갖고 들어갈 수 없어서 센터에 맡겨도 되겠냐며 엄마가 부탁했다.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대답했다.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뭐든 하겠다고 했다. K 엄마는 아이가 센터를 다니기 때문에 분명 찾아올 게 뻔하고, 센터가 피해를 입을 수 있는데 어떻게 하냐며 걱정했다. “어머니, 그건 제가 할 역할이니까 걱정하지 마시고, 마음 추스르시고 앞으로 어떻게 할지만 생각해요” 그렇게 두 사람을 보내고 나도 앞으로 벌어질지도 모를 일에 대해 생각했다.


그 이후 엄마는 한동안 기관에 찾아오지 않았다. 오로지 K를 통해 모든 것을 전달받았다. 엄마와 당분간 숙박업소에서 지내며 집을 알아봤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수지 학교 근처에 집을 구했고, 둘이 살게 됐다. 엄마는 이혼을 원했지만, 남편과 얼굴을 마주할 자신이 없다고 남편 연락을 피했다. 아빠는 엄마와 K가 연락이 닿지 않자, 찾기 시작했다. 센터로 전화를 여러 차례 했지만, 나는 모른다고 답변했다. 화가 난 K 아빠가 결국 센터로 쳐들어오고 말았다. 신발을 신은 채 들어와서 격한 목소리로 아이를 찾는 아빠를 여자 둘이 막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K가 교실에서 수업하고 있었기에 이대로 들통나면 큰일이었다. 아빠 앞을 가로막고 말했다. 


“집에 가고 없어요. 어린이들이 있는 곳에서 소리 지르고 소란 피우면 신고하겠습니다” 내 말을 들은 아빠는 그대로 나가버렸다. 혹시 센터 앞에서 아이를 기다리고 있을까 봐 몹시 불안했다. 결국 퇴근길에 K를 집에 데려다줬다. 사실 부모가 만나서 해결해야 하는데, 미루고 있으니 내가 해줄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단지 K 신변 보호에만 신경을 썼을 뿐.


이후 K 아빠는 더 이상 센터에 찾아오지 않았고, 다행히 학교로 찾아가지도 않았다. 같은 동네에 살다 보니 언제든 만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엄마는 불안한 마음에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결정했다. 그런데 엄마와 함께 가야 할 수지가 센터와 학교를 졸업하겠다고 따라나서지 않겠다는 선포를 했다. 엄마와 내가 아무리 설득해도 통하지 않았다. 엄마는 그 고집을 꺾지 못하고 먼저 이사를 했다. K가 엇나갈 아이도 아니란 걸 누구보다 확신했다. 특히 센터 다니는 것을 좋아했고, 꿈이 있는 아이여서 그 점을 굳게 믿었다. 엄마는 먼저 이사했고, 주말마다 서울에 왔다. 나는 평일에 K를 더 신경 썼고, 엄마와 소통했다. 그렇게 K는 1년 넘게 혼자 살았다. 






중학교 3학년 겨울방학 시작과 동시에 K는 서울살이를 접고 엄마에게 갔다. 6년 동안 K와 함께 하면서 수많은 어려움을 이겨나갔다. 비록 어린아이였지만, 든든한 울타리 같았다. 함께 공부하면서 K에게 배웠고, 의지했다. 그런 K를 보내는 마음이 무겁고 허탈했다. 엄마 말은 듣지 않아도 우리가 하는 일에는 무조건 응하며 따랐던 참 고마운 아이였다. 가만 돌아보면 내가 K를 떠나보내기 싫었던 건 아니었는지 모르겠다.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아프리카 속담이 있다. 물론 중요한 이야기다. 그러나 아이가 성장하면서 꼭 부모가 아니더라도, 믿고 의지할 어른이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은 환경이 있을까? 생각한다.


매해 스승의 날이 되면 연락하는 K. 한국사능력시험 1급을 취득하기 위해 1년 반 동안 죽도록 함께 공부했던 그 시간을 잊지 못하겠다는 아이 한국사 선생님이 되겠다고 말했다. 지금도 그 꿈을 실현하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 어린 시절 가정에서 있었던 일이 가슴 깊이 아픔으로 남아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아픔을 잘 추스르고 지금은 훨씬 더 강하게 성장하고 있는 K를 응원한다.


20살이 되는 날, 맥주를 사주기로 약속했다. 나는 그날을 손꼽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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