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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퍼플슈룹 Aug 17. 2022

시집만 잘 가면 된다고 말했던 부모,

통금을 걸다

입시에 실패한 나 때문에 엄마는 불행의 늪에 빠져서 외출도 하지 않았다. 죄인 모드로 살기 6개월쯤 됐을까? 엄마가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괜찮아! 여자는 시집만 잘 가면 된다



장녀였던 나의 입시 실패는 부모님께 커다란 좌절을 안겨드렸다. 이해 못 하는 것도 아니었지만, 나야말로 세상을 다 잃은 것처럼 힘들었기 때문에 부모님의 상처와 마주할 힘이 없었다. 하필 친한 친구들마저 대부분 대학에 합격해서 비교와 좌절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할까? 나를 아껴주셨던 고3 담임선생님이 불행한 20살 인생을 지도해 주셨고 우여곡절 끝에 신문사 취직까지 이어진 것이다. 지금의 내가 있게 만들어주신 감사한 분이다.  


신문사에 취직하고 본격적으로 선을 보러 다니기 시작했다. 엄마 말대로 '나는 시집만 잘 가면 효를 다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최선을 다했다. 그런데 결혼이 뭔지도 모르는 철부지 22살, 결혼하려고 나온 남성들 눈에 어떻게 비쳤겠나?


결과는 대실패.






우리 부모님은 무척 엄했다. 생각을 나누는 것은 절대 할 수 없었고, 그저 하라는 대로 살아야 했다. 그 시절 대부분 그랬다지만 모두 그렇게 살았던 것은 아니다. 내가 부모를 이길 만큼 강한 아이가 아니었던 것은 확실했다. 


자식이 빨리 결혼하길 바랐던 부모였지만 통금을 걸어놨다. 그렇다고 결혼을 못 하는 것은 아니지만, 부모를 이길 힘이 없던 나는 뜻을 거스르지 않았다. 연애하려면 부모가 원하는 남자를 만나야 했는데, 그럴 자신도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나란 사람, 마음이 많이 아팠던 것 같다. '집에서 벗어나기 위해 결혼해야겠다'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결혼하면 불행한 삶을 살 것 같다는 생각에 일에 집중했고, 오히려 공부를 시작했다.


좋은 데 시집가길 바라는 부모였지만 자식의 두 손, 두 발을 꽁꽁 묶어놓았다. 사랑이었다지만, 너무도 과격했기에 자식이 병들어 가고 있음을 알아채지 못했던 부모. 부모를 원망했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나.


세월이 지나 부모는 70대, 특히 엄마는 희귀병에 시달리고 있다. 지금은 더 이상 옛날 얘기는 꺼내지 않고 서로에게 깊이 새긴 상처를 보듬고, 이해하며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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