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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nia Sep 27. 2020

살 수도 죽을 수도 없는 이유

요즘 부쩍 죽고 싶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 '나는 왜 사는 거지?' 답 없는 의문이 간헐적으로 머릿속에 떠오르고, 이유 없이 차오르는 눈물에 목이 막힐 때, 부모님이 떠오른다. 죽고 싶지만, 나는 외동이라서 죽을 수 없다.


성공하고 싶었다. 이 문장이 과거형인 것에 대하여, 또 이 문장이 품은 절대적인 의미에 대해 반박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 것 같다. 너는 여전히 성공할 수 있다고. 왜? 아직 25살이니까. 그리고 이 정도면 성공한 것 아니냐고. 코로나 때문에 다들 잘 다니던 직장에서 짤리거나 취업조차 할 수 없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래도 너는 빨리 취직해서 회사 잘 다니고 있지 않느냐.


맞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죽고 싶다. 내가 현재까지 이룬 모든 것들이 아무 의미가 없어 보인다. 


이번주 월요일에 부동산에 집을 보러 갔다. 몇주전 지금 살고 있는 집주인으로부터 계약 연장을 해주지 못한다는 통보를 받은 뒤, 급하게 연락해 집을 보러간 날이었다. 당시에는 옳은 판단이라고 생각했으나, 지금 생각해보면 매우 충동적으로 한 집을 가계약해버렸다. 전셋집이라 어쩔 수 없이 부모님께 손을 벌렸는데, 이때문에 부모님은 세우던 노후 계획을 바꿨다. 나는 또다시 부모님께 짐덩이가 돼버렸다. 나는 못난 딸이다. 


엄마는 자꾸만 부산에 내려오라고 성화였다. 나는 매번 그래도 이 회사에서 1년은 다녀보고 싶다고 말했다. 이유는 특별하지 않았다. 글을 사랑해서도 아니었고, 대성공한 에디터가 되고싶어서도 아니었다. 그저 '1년'은 채워야 다음 비슷한 직장에 들어갈 때 경력이 인정되니까. 특별한 이유없이 다니는 회사는 내게 큰 감흥을 주지 않는다. 게다가 가끔씩 참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는 한다. 예를 들어, 내가 쓰는 글이 너무 많아 바이라인을 2개로 사용하라던가 하는 요구 말이다. 

*바이라인: 신문잡지에서특종 기사 또는 기자의 수완노력이 돋보이는 기사에 대하여 필자의 이름을 넣는 .


작은 회사에서 하는 작은 일. 나의 이름이 달린 글을 쓰면서 자부심을 느껴본 적이 거의 없다. 사실 하나도 없을 지도. 코로나 때문에 취재를 갈 수 없어 내가 쓰는 글은 전부 인터넷에서 참고한 것들이다. 명색이 '에디터'이기 때문에 복사해 붙여넣기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내 글'이라고 하기엔 조금은... 아니 사실은 많이 부끄러운 글들을 쓰고 있다. 한마디로 일에서 느껴지는 보람이 없다.


작은 회사에서 받는 작고 소중한 월급. 세후 180만 원을 벌고 있다. 월세를 내고, 점심을 매번 밖에서 사 먹고, 친구와 몇 번 놀고 나면 저축하기도 빠듯하다. 나를 위한 소비를 거의 할 수 없다. 

친한 친구가 친하다는 이유로 자꾸만 자신의 벌이를 얘기해줄 때, 너무 비참하다. 그녀석은 아직 학생이지만 수완이 꽤 좋다. 매번 좋은 기회를 잘 잡고는 나에게 이만큼의 돈을 받을 수 있다고 자랑한다. 그 자랑이 나에게는 썩 부담스럽다. 나보다 적게 일하고 나와 비슷한 돈을 받아가니 말이다. 나는 멍청이가 아니니 이런 비교가 우습다는 것쯤은 안다. 하지만 사람이 비참해지니 자꾸만 그 사소한 '액수'에 집착하게 된다.


학생일 때 나는 적어도 지금보다는 대단한 일을 할 줄 알았다. 그러나 나는 우물 안 개구리였나 보다. 지방 국립대여도 서울에 오니 그것은 별 것 아닌 것이 돼버렸다. 열심히 아르바이트를 해서 외국도 많이 다녀 와서 그것이 나름의 스펙으로 인정받을 줄 알았는데, 결과적으로 '놈팽이'라고 인증하는 꼴밖에 더 안됐다. 그 시간에 대외활동과 공모전을 했어야 하나 보다. 


결론적으로 나는 취업 시장에서 별다른 매력없는 사람인 듯 했다. 그것을 수십번의 '서탈'로 증명받기 싫어 최대한 빨리 취업을 할 수 있는 길을 찾았다. 그래서 쉽게 취업을 했다. 잡지교육원을 통한 에디터로. 


자꾸만 희망을 가져보려 했으나 더이상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나는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지 모르겠다. 부모님은 자식 새끼 하나 바라 보며 산다고 하고. 열정적인 젊은 청년은 이루고자 하는 목표를 쫓는다. 하지만 나는 어느 것도 아니다. 내게는 삶의 이유가 될 만큼 큰 무언가가 없다. 


그러나 죽어서는 안될 이유는 있다. 바로 이게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거다. 살고 싶지는 않은데 죽어서도 안되는... 바로 부모님 때문이다. 내가 죽으면 누구보다 슬퍼할 사람들. 하필이면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기에 죽은 자식이 지옥불에서 튀겨질 생각으로 밤잠 못 이루실 부모님을 생각하면 죽을 수 없다. 


내일은 월요일이다. 평소처럼 눈을 뜨고, 지하철을 타고, 수수한 옷을 입고 출근하겠지. 설렘이 없는 삶이란 그닥 구미가 당기는 일은 아니다. 사람들은 왜 사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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