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평범한 일, 어쩌면 쉽지 않은 일
엄마의 공간에는 언제나 달력이 있었다.
싱크대에는 작은 탁상달력이 매달려있고,
거실과 부엌 사이의 기둥에는 두개의 달력,
식탁 곁에는 내가 처음 만들었던 달력,
화장실에는 은행에서 받은 달력,
심지어 차에도 작은 달력을 놓으신다.
이렇게 곳곳에 달력이 있는 달력친화적인(?) 환경에서 자라나서인지
지금도 달력 없는 공간은 어딘가 허전하다.
작은 문구회사를 그만 두면서 처음으로 진행했던 작업은 달력이었다.
장난인듯 진지하게 새로운 브랜드와 제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가 만들게 된 커다란 달력.
그 달력을 시작으로, 벌써 11번 째의 달력을 만들고 있다.
2015년 한 해를 건너뛰고 2년만에 새로운 달력을 작업해서인지
이런저런 지난 일들이 새록새록 떠오르는 요즘이다.
몇해 전 문득, 달력을 만드는 것이 가볍지 않은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었다.
그 생각을 하게 된 가장 큰 계기는 아마도 2009년 3/4분기쯤.
2009년 초, 내가 만든 달력을 받고는 너무 좋다고 잘 쓰겠다는 댓글을 달아주었던 한 친구가 있었다.
우리는 그리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지만, 그 작은 리액션에 큰 힘을 얻을 수 있어 참 고마웠다.
그런데 그 해가 끝나기 전, 친구는 달력을 끝까지 쓰지 못하고 교통사고로 세상을 뜨게 되었다.
그 일이 일어나기 전에 나는 친구에게 고맙다는 이야기를 했었을까.
'내가 별 생각없이 적어내려간 많은 날들 중 어떤 날은 누군가의 마지막이 될 수도 있구나'라는 사실이
당시에는 조금 잔인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지금은 그 감정이 좀 희석되었지만, 여전히 달력을 만들 때면 여러 감정이 마음을 들락날락한다.
그런 감정들을 바라보노라면,
하루하루를 적어 내려갈 때 조금 더 정성스럽게,
기도하는 마음으로 즐거운 일이 더 가득하길 바라며 작업하게 된다.
누군가는 아날로그 달력이 필요하지 않다고 말한다.
늘 곁에 두고 있는 스마트폰이나 컴퓨터에서 충분히 볼 수 있는 것이 달력이니까.
맞는 말이다.
나 또한 디지털 달력을 활용하고 있기도 하고.
그렇지만 기술이 발전하고 디지털이 생활에 밀접해질수록,
나는 왠지 디지털기기에의 의존도를 의도적으로 낮추고 싶다.
중요하고 소중한 것들이 응집된 스마트폰을 잃어버렸을 때의 심리적 충격을 겪어본 후로
그런 생각이 더 짙어진 것 같다.
할머니의 장례를 치루고 며칠 지나지 않아 떠난 가족과의 제주도에서
그 기록이 담긴 (미처 백업하지 못한) 스마트폰을 잃어버렸었다.
기기를 잃어버린 것이 속상하다기 보다는, 추억을 빼앗긴 것 같은 느낌에 많이 슬펐다.
충격은 생각보다 강했고, 분실 기간동안 스마트폰으로 했던 것들을 아날로그로 하기 시작했다.
사진은 카메라로 찍고, 일기는 일기장에 적고,
시계는 손목시계로 보며, 레시피는 프린트하거나 적어서 보관했다.
한 물건에 너무 여러가지 책임을 지워주지 말자는 생각이 들다보니,
하나의 물건이 하나의 쓰임에 충실한 것이 멀티펑션보다 훨씬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그런 변화는 나의 달력들에도 고스란히 나타난다.
다양한 쓰임을 전면에 내세웠던 2009-2010년의 달력에서부터 단순하고 컴팩트한 2016년의 달력까지.
작년 겨울, 여차저차한 이유들로 마음의 에너지가 부족하여 달력작업을 건너뛰었고,
2년만에 새로이 2016년의 달력을 작업했다.
오랜만에 마주하는 나의 달력은 조금 새로운 느낌이다.
여전히 무언가를 만들어서 세상에 내놓기란 쉽지 않지만,
이번에도 역시 좋기도 싫기도한 마음이 다 존재하는 쉽지 않은 상태이지만,
왠지 새힘을 얻은 느낌이랄까.
오랜만인 만큼 하루하루를 더 정성스레 적어내려간 새로운 달력,
그안의 날들에는 힘나는 일들이 조금 더 많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