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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회월 Dec 23. 2023

자전적 詩論

바라보기, 알아차림, 치유의 詩

#1


한 소녀가 눈물을 훔치며 훌쩍이고 있다. 어스럼한 저녁, 길모퉁이에 쭈그리고 앉아 때 탄 손에 나뭇가지를 쥔 채 무엇인가를 그리는지 쓰는지......


그 때 노을을 배경으로 소녀의 이름을 부르는 한 사람. 소녀는 벌떡 일어나 까만 눈물을 소맷부리로 닦으며 “아빠”하고 뛰어간다.


이를 바라본다.


 


#2


시골 툇마루 끝자락에 엉덩이를 걸친 채 무언가에 열중하고 있는 소녀. 이미 고사리 손을 벗어나 벌건 단풍이 든 손. 소녀는 손끝이 아리도록 할머니가 내어 주신 마늘을 까고 있다. 손끝이 붉게 물들어 간다.


때때로 저 멀리서 들리는 아득한 기적소리. 경부선 열차 끝자락을 잡으며 “ 엄마”를 부른다.


이를 바라본다.


 


#3


사랑, 꽃물 들어간다.


지금도 나는 너희 집으로 전화를 해. 끝내 너는 내 전화를 받지 않았어. 15년이 지나 지금도 난 그날 너의 모습만 생각나. 막차를 타고 손을 흔들던 너의 모습. 검은 아스팔트 위를 붉은 네온이 점을 찍어 내리던 그 밤이 우리의 마지막이었어. 그때 고모라 같은 도시의 밤은 어둡지 않았어. 노란 가로등과 안개와 붉은 간판 속에 인간들을 가두어 놓고 있었어. 나도 그 속에 묻혀있으면서 울었던 것 같아. 너가 떠난 밤이었는데 말야.


이를 바라본다.


 


#4


까치 발 들어 멀리 사라져간 기차의 흔적만을 애써 잡고 있는 여덟 살 그녀에게 마흔다섯의 그녀가 다가간다. ‘슬퍼도 속으로 울지 마라. 엄마가 보고 싶으면 여덟 살 아이처럼 떼를 써보렴. 집으로 가고 싶다고 말해봐.’ 살포시 껴안으며 등을 토닥토닥.


마흔 다섯의 그녀는 열 살적 그녀를 바라본다. 길모퉁이에서 두려움으로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누군가를 애타게 기다리는 소녀에게 다가간다. 울고 있는 열 살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아준다. ‘무서웠구나. 아이야...’


마흔 다섯의 그녀. 어김없이 찾아오는 계절, 몸으로 기억 된 지난 사랑의 시간. 아무도 모르는 울음의 기억. 가슴을 쓸어내린다. ‘슬프구나, 너는...’



유년의 나와 만나는 일 쉽지 않았다. 기억은 다소 왜곡의 우려가 있긴 하지만, 기억의 끝에서 난 항상 그 왜곡을 잡고 놓지 않고 있었다. 그것이 현실에서의 삶을 고단케 했으며, 알 수 없는 내재된 분노를 표출하고 싶게도 했다.


이런 나에게 일어난 사건, 시와의 조우, 치열한 만남, 나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만든 장본인, 결코 이해하거나 용서받지 못할 것 같은 내 감정을 단숨에 바꿔버린 너.


이렇게 시가 나에게로 왔다. 때로는 강렬한 흐느낌으로, 때로는 감미로운 음악이 되어서 내게로 온 것이다. 시를 통해 유년의 나와 만나고, 첫사랑의 아련한 기억을 떠올릴 수 있었으며, 내가 떠나온 모든 것을 회상할 수 있게 되었다. 마음이 아팠던 열두살의 나를 안아주게도 했고 감정의 이름을 읽어주기도 했으며 폭풍처럼 마음을 흐트러놓고 떠난 사랑의 아픔으로 힘든 나를 일으켜 세워 두 손을 꼭 잡아주기도 했다.


라는 공간 안에서 관습과 제도와 법에 얽매인 자아를 해체해서  과감해지기도 했으며,  부모로부터 내려 받은 역마와 바람의 기운을  실현에 옮기기 위한 훌륭한 도구도 역시 시 밖에 없었다. 나를 상상하게도 하고, 나를 묶어 놓기로 한 시간의 기록을 감히 발설하게도 하는 것이 시라고 말할 수 있다.


시는 드러냄으로서 나를 치유하는 처방전이라는것을

가슴깊이 알아차린다.



「글을 쓰는 데는 당신의 온 몸, 즉 심장과 내장과 두 팔 모두가 동일해야한다. 바보가 되어 시작하라. 고통에 울부짖는 짐승처럼 볼썽사나운 모습으로 시작하라


            나탈리 골드버그-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 중에서

왜 글을 쓰는가에


 고민에 대한 짪은 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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