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 전 여름, 나는 국립과천과학관에 아들이 좋아하는 자연사 전시관에서 시간을 보냈다. 그곳에는 아이들의 흥미를 끌만한 공룡이며 파충류, 양서류, 다양한 종류의 어류들을 전시해놓고 있었다. 아들은 커다란 수족관에 눈을 떼지 못하였고, 나의 눈은 아들 시선을 따라다니다가 우연히 사각 유리 상자 속에 전시되어 있는 여러 동물들에게 멈추게 되었다. 이름을 알 수 없는 여러 종류의 뱀이 있는 유리 상자 옆에 참개구리 두 마리가 들어 있는 투명 유리상자가 눈에 띄었다. 어렸을 때 흔하게 보던 개구리였다.
아이들이 가끔 동네 문구점에서 사 온 올챙이를 키워 본 적은 있어도 개구리를 본 것은 정말 오랜만이라 유리 상자 가까이로 나는 다가갔다. 팔짝팔짝 냇가와 풀숲을 뛰어다녀야 하는 개구리가 상자 속에서 정물처럼 놓여있었다. 눈을 껌벅이지 않았다면 조각상으로 오인할 정도로 움직임이 거의 없었다. 그때 짓궂은 남자아이가 유리 상자를 손으로 툭툭 치는 것이 보였다. 그때서야 한 마리의 개구리가 유리벽에 제 몸을 부딪치며 뛰어오르려고 했다. 몇 번의 뛰어오름과 부딪침이 끝난 후에야 포기를 했는지 멈춰 선채로 사진의 한 컷인 양 가만히 있는 것을 보니 문득 개구리 때문에 힘들었던 유년 시절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내가 살았던 곳은 낮은 단층의 셋집들이 우물을 중앙에 두고 마주 보며 쭉 늘어서 있는 곳이었다. 대부분 방 한 칸에 부엌하나를 둔 네 식구 이상이 사는 어려운 형편의 사람들이 모여 살았다. 대낮에는 항상 아이들과 우물에서 빨래하는 아주머니들이 있어 좁은 마당에 사람이 벅적벅적하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래도 우리 집은 방 두 개에 부엌과 화장실이 있는 전셋집이었다. 유일하게 우리 집에만 전화와 텔레비전이 있어서인지 동네 친구들은 저녁시간 tv만화 시청권을 따기 위해 나에게는 무척 호의적이었다. 그래서인지 남녀불문하고 어떤 놀이에도 나를 끼워주었다.
그때만 해도 동네를 지나는 개울이나 냇가는 흔히 볼 수 있었다. 너비 1미터도 안 되는 개울에서 발을 담그고 놀았으며 넓은 개울에서는 몸을 담그기도 했었다.
녹음이 짙어지고 탱자나무 열매가 진초록으로 변해 갈 때쯤, 동네 머슴애들 사이에서 즐겨 행해졌던 놀이가 개구리 잡기였다. 이때쯤이면 개구리들이 살이 올라 통통했으며 제법 큰 녀석들도 눈에 많이 띄었다. 조금 깊이가 있는 물에서는 긴 나뭇가지에 줄을 매달아 개구리 낚시를 했고 얕은 물에서는 폴짝폴짝 뛰어다니는 개구리들을 잠자리채로 낚아채기도 했다. 이렇게 잡은 개구리들은 큰 채집망이나 플라스틱 페인트 통에 담겨 개구쟁이 남자아이들의 놀잇감이 되었다. 놀이 중에 왜 그때 그런 놀이를 하며 아이들이 즐거워했는지 지금도 알 수가 없다. 놀이라고 하기에는 잔인한 하나의 의식이 행해졌다고나 할까...
남자애들은 굵은 나뭇가지를 십자 모양으로 엮어 거기에다 개구리의 허연 배가 보이도록 팔과 다리를 묶었다. 개구리들은 나일론 실에 네 다리가 묶인 채로 여름 뜨거운 햇살을 고스란히 받으며 죽어가거나 말라갔다. 나는 그 잔인한 의식에 가담은 하지 않았었다. 얼굴 하얗고, 비쩍 마른 병약한 여자애가 참견하기에는 한두 살 많은 동네 남자아이들의 그런 의식은 너무나 위협적이었기 때문이다.
해가 지고 난 후, 동네 아이들이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고 나면 나는 집에 있는 서랍에서 바르고 남은 용도가 명확지 않은 연고를 들고 나와 의식이 행해졌던 장소로 갔다. 어둠 속에서 나는 색색의 실로 동여매어진 개구리의 팔과 다리를 풀어주고 붉게 자국이 난 상처나 이미 파여 살점이 떨어져 나간 개구리의 팔과 다리에 연고를 발라 주었다. 이미 죽은 개구리는 손을 쓸 수가 없었지만 허연 배가 움찔대는 것은 살아 있다는 것이므로 연고를 발라 물에다 풀어주었다. 유유히 개구리헤엄으로 물살 따라가는 개구리를 보면 마음이 편해졌지만, 물에 풀어놓자마자 맥없이 가라앉는 개구리를 보면 어린 나이임에도 알 수 없는 공포감이 밀려오곤 했다. 그런 밤이면 여지없이 악몽에 시달리면서 엉엉 울어서 부모님을 놀라게 하였다. 아마도 낮에 보았던 개구리의 처형 장면이 꿈속에서 그대로 재현되었을 것이다.
개구리 처형사건 이후 나에게 있어 개구리는 금기였다. 때로는 살이 오른 개구리 뒷다리를 동네 공터에서 구워 먹다 불장난한다고 동네 어른들에게 쫓겨 다니던 오빠와 남동생. 그들이 집으로 돌아올 땐 매캐한 탄내와 개구리의 민물 내를 달고 들어 왔다. 그리고 몸이 허약한 딸에게 사골국물이라고 속여 먹이려 했던 마른 개구리를 달인 물에서도 나는 개구리의 민물 내를 맡고 헛구역질을 해대었다. 등짝을 두들겨 맞으면서도 나는 토를 멈추지 못했었다.
횡보 염상섭 선생의 대표적 소설 ‘표본실의 청개구리’를 보면, 주인공 ‘나’는 중학교 때 경험한 청개구리 해부를 떠올리며 불면증에 시달리게 된다. 그는 우연히 남포항으로 가던 중 들른 평양에서 긴 머리의 광인(狂人)을 만나게 되고 그의 불행한 개인사를 들으면서 표본실의 청개구리를 떠올린다. 사지에 핀이 박혀 꼼짝하지 못하고 사지를 뒤틀며 아이들이 내장을 건드릴 때마다 꿈틀거리는 모습에서 아마도 그는 불행한 민족의 슬픔을 그리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주인공‘나’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던 청개구리의 해부장면처럼 30여 년이 지난 지금도 나의 머릿속에는 개구리의 십자가 처형장면을 쉽게 지우지 못하고 있다. 우연히 보게 된 자연사 박물관 내 유리 상자 속 참개구리. 흔히 볼 수 없기 때문에 박물관에 전시된 동물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유년에 보았던 십자가형을 당한 슬픔과 좁은 유리 상자 속의 슬픔이 결코 달라 보이진 않았다. 그리고 벗어나지 못한 기억에 얽힌 나의 슬픔과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지금은 박물관에 전시되어 사육되고 있는 참개구리지만 10년이 지나고, 20년이 지난 후 개구리를 전혀 볼 수 없는 시대가 오면 박물관에서 박제된 참개구리, 투명액체에 절여져 있는 해부된 개구리를 보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면 나는 다시 한번 내 유년의 기억으로 긴 불면의 밤을 보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