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릇
중학교 때 친구에게 책을 빌렸다. 읽어보니 좋아서, 친구가 달라고 할 때까지 가지고 있었다. 날마다 봐도 말이 없었다. 지금도 내 책장에 있는 ‘관촌 수필’이다.
작은언니까지 도시로 가 버리고, 집에 갑자기 혼자 남았다. 그렇게 싸웠는데, 그렇게 금방 보고 싶을지 몰랐다. 학교 끝나고 집에 오면 덩그러니 혼자 있었다. 도시에서 자란 친구들은 그때 학원에 다녔다고들 하던데, 다행히 시골엔 피아노 교습소 뿐이었다. 내가 이미 오래전에 때려치운.
처음으로 책에 눈이 갔다. 몇 년 전 아빠가 사다 두신, ㅅㅅ출판사에서 나온 갈색 양장 표지의 세계문학 전집이 있었다. (이 전집을 가지고 있는 집이 많다) 맨 처음 읽은 책은 ‘까라마조프네 형제들’이다. 글씨도 작고, 길기도 했지만 재미있었다. 웃긴 게, 난 누구네 가족들 이야기를 듣는 것 처럼 읽었다. 아, 이 집은 이렇구나, 아들들이랑 아버지랑... 이러면 안 되는데... 아들들이 많으니까, 아버지가 막살아서 아들들이 그러는 거잖아.
다음에 읽은 건 펄벅의 ‘대지’다. 이것 역시 왕룽이란 속되고도 속된 아버지 때문에 고통받는 아내와 그 가족이야기일 뿐이었다. 이런 아버지가 다 있어? 가족들은 얼마나 짜증날까. 아주 단순하게, 딱 내 ‘그릇’ 만큼 이해하고, 생각했다. 작가 펄벅이 중국인이 아니라는 것에 놀라워하면서.
‘좁은 문’을 읽을 때는 ‘아, 그래, 사랑이란 이런 것이지, 숭고하고, 자기희생적이고... 이런 게 진정한 사랑이지’ 하면서 ‘중학생 갬성’을 물씬물씬 풍기며 혼자 취해 읽었다. 울지나 않았는지 모르겠다. 나중에 나이 먹고, 좁은 문을 다시 읽었는데... 어찌나 속이 답답하던지. 읽던 책을 엎어 놓고, 후~ 숨을 쉬고는 다시 읽었다. 끝까지 읽는 것도 힘들었다.
이문구 작가님의 ‘관촌수필’은 바로 옆 동네 어디 이야기였다. 충청도 사투리를 잘 몰라도 너무도 자연스럽고 재밌었다. 같은 책에 있던 ‘우리 동네’도 마찬가지다. 물론 너무도 사투리가 길게 이어져 알아서 끊어서 천천히, 중간에 다른 책을 읽고 쉬기도 하면서 읽어야만 했지만, 작가님 우리 동네나 내가 사는 우리 동네나 다 비슷하구나, 글로 말을 이렇게 그대로 쓸 수도 있구나 하면서... 내 '그릇'을 채웠다.
아무 생각 없고, 목적 없이.. 그저 무료한 시간을 달래려고 가장 많은 책을 읽었던 시기가 그때다. 지금도 책을 읽지만... 그때랑은 다르다.... 많이 다르다. 뭐 그릇도 그다지 커진 거 같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