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딧불이가 발하는 빛이 상실될 순간에
무라카미 하루키는 ‘상실의 시대’라는 제목을 그다지 좋아하진 않았다. 지금은 누적된 적자로 무기한 휴간을 결정한 문학사상사가 판매량이 저조했던 제목인 ‘노르웨이의 숲‘에서 '상실의 시대'로 제목을 바꾼 후, 그야말로 '하루키 붐'을 일으키며 대히트를 쳤지만.
하루키와 달리 나는 '상실의 시대'라는 제목을 좋아한다. 주인공 와타나베 토오루의 인생, 그의 시대를 표현하기에 상실의 시대만큼 적절한 표현이 있을까 싶다. 그의 최외각 전자 역할을 하던 소중한 사람들은 다 자살해 버려 사라졌다. 그의 젊은 시절 인생을 기막히게 함축한 표현이자 가장 적절한 제목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봐도 <노르웨이의 숲>이라는 제목은 정상적인 연애 소설로써 적절한 제목이 아니다. 내가 받은 책의 제목이 <상실의 시대>가 아닌 <노르웨이의 숲>이었다면 노르웨이의 숲? 거기서 뭔 짓을 하겠다는 거야, 그리고 어떤 공간이지? 같은 시답잖은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내가 본격적으로 독서를 시작하게 된 것은 <노르웨이의 숲>을 읽고 나서부터였다. 하지만 이후에 읽었던 다른 작가의 소설에서는 <노르웨이의 숲>에서 느낀 후유증과 몰입을 느끼지 못했다. 이제 보통의 책들은 나를 만족하지 못한다. 실수로 손가락에 집어넣은 작은 반지처럼 하루키의 문장에서 빠져나오는 데에 많은 고생을 했다.
보통의 책들에 있는 보통의 표현들은 나를 만족시키지 못했다. 하루키의 소설에는 서술자가 인물의 묘사와 정황을 지나치게 섬세하게, 과장되게, 그리고 냉소적이고 솔직하게 표현한다. 끊임없는, 그리고 기발한 비유들은 나를 미치게 했다. 읽는 내내 항상 감탄과 경의를 느꼈다. 이 점이 나를 작품 속으로 점점 빠져들게 했다. '그래봤자 흔한 연애 소설이 아닌가?'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30분이라도 책을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난해한 내용으로 정신이 나가버릴 것 같았지만, 그 점이 나에게 마약 같은 역할을 했다.
책을 2 회독하는 시점에서 나는 또 다른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처음 읽을 땐 와타나베와 나오코 사이의 중심 내용을 '이해'한다는 목적으로 읽었지만, 다시 읽어본 <노르웨이의 숲>은 서술자 와타나베의 표현들에 집중해서 읽었다. 워낙 내용이 난해한 점도 한몫하는 듯. 내가 놓친 표현과, 몇몇 인물의 대사가 '왜 처음 읽을 땐 이 대사를, 이 표현에 인상을 못 느낀 것이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노르웨이의 숲>에서는 성적인 표현들이 거침없이 등장한다. 이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의 특징인데, 이게 꺼리는 사람들은 대개 하루키의 소설을 좋아하지 않는다. 사실 나는 작품을 읽으면서 시도 때도 없이 등장하는 대담한 성적 표현을 처음 직면했을 때, 그동안 다른 소설에서 읽었던 표현들과는 비교될 정도로 적극적이고, 저돌적이어서 당황했다. 하지만 내용에 몰입하면 몰입할수록 이러한 성적 표현이 내용에 잘 스며든다고 생각한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나의 두뇌 속 어느 공간에 그의 문장을 이미지화해서 집어넣었다. 상술했던 기막힌 비유 외에도 주변 환경들과 인물 사이의 섬세한 관계, 한 번도 경험해 본 적 없는 ‘돌격대’와의 기상천외한 룸메이트 생활까지 모두 언어-텍스트로만 표현되지만, 모두 내 머릿속에서 하나의 또렷한 이미지로 존재한다. 특히 내가 생각나는 것은 가보지도 않은, 정말 알 수가 없는 공간마저도 구체적으로 생각나게 한다. 감나무를 발로 차면 감이 후드득 떨어지듯이. 이 현상이 가장 극적인 부분은 소설의 후반 부분이었다. 와타나배는 나오코가 죽어 버린 뒤, 한참을 방황하며 전국을 다니다가 어떤 어부에게 돈과 술을 반 강제로 얻어먹는 장면이다. 짐작도 안 가는 고독하고 깜깜함 공간에서 잠시만 기다리라는 어부의 모습, 정신이 나가서 어부의 어머니 이야기를 공감조차 못하지만 겉으로 공감해 주는 와타나베의 멋쩍은 모습까지 하나하나 내 뇌 속 어느 한 부분에 자리 잡은 느낌이다. 다른 소설도 그 내용에 맞는 공간의 이미지가 생각나긴 하지만, 읽은 지 시간이 꽤나 지나고 그 부분을 다시 읽으면 기억도 나지 않는다. 하지만 하루키 소설에서 표현된 모든 공간만큼은 무서울 정도로 섬세하게 기억난다.
깨알같이 등장하는 여러 음악들은 소설에서 일어나는 사건에서 항상 함께 한다. 와타나베가 나오코를 처음 안은 밤에도, 와타나베가 나오코에게 편지를 쓸 때도, 뜨겁고 진하고 맛없는 커피를 마실 때도 항상 재즈 음악은 작품에서 빠지지 않는다. 마치 그림자가 물체를 따라가듯이. 애초에 책 이름부터가 비틀스의 노래 'Norweigan Wood'이다. 그리고 이 노래는 작품에서 여러 번 등장한다. 맨 처음 와타나베가 과거를 회상하게 된 이유이자, 나오코가 가장 좋아하는 노래이다. 가사 내용은 여자가 자신을 자취방에 초대해 놓고 술도 마시면서 분위기가 좋았지만 자신과 잠자리를 같이 하지 않아 열받아서 그 여자의 집을 태운다는 내용이지만.
"나를 꼭 기억해 줬으면 하는 것. 내가 존재했고, 이렇게 와타나베 곁에 있었다는 사실을 언제까지라도 기억해 줄래?"
소설의 극초반, 이미 어른이 된 와타나베가 비행기 안에서 어린 시절을 회상하는 부분이다. 몇 번을 읽어도 이 부분에서 머리가 아프지 않을 수가 없었다. n회독을 할 때마다 이 페이지에서 머무르는 시간이 길어졌다.
결국엔 와타나베는 18년 전 초원의 풍경은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으나, 그 초원 속의 사람은 기억할 수 없었다. 어린 시절 주변에 존재하던 사람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기억 속에서 상실되는 것이다. 어렸을 때 누가 나에게 이런 말을 했었다. "인간의 뇌는 항아리처럼 용량이 정해져 있어서, 새로운 것을 배우게 되면 기존의 기억을 점점 지워가는 거래." 이 말을 들은 지 정말 오랜 시간이 지난 것 같지만, 아직도 내 뇌리에 깊게 박혀 있다. 이런 말을 처음 들은 어린아이였던 나는, 신경 다발이 끊어지는 듯한 강한 인상을 느꼈다. 그게 정말인가? 어느 순간 내 뇌 용량이 가득 차버리면, 내가 쓰는 한국어도 까먹는 걸까? 사람에 대한 기억도? 정말 무서웠다. 이런 섬뜩한 생각은 또렷하게 기억난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누가 나에게 이 말을 했었는지 도저히 생각이 나지 않았다. 어쩌면 나도 아무것도 아닌 어느 장소 한가운데에서 누군가를 기억하려고, 또는 누군가를 부르려고 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 지금 내게 소중한 사람들도 언젠간 사라질 것이다. 마치 반딧불이의 꽁무니에서 발하는 빛이 사라지는 것처럼. 이런 생각을 하자면 섬뜩하기도 하지만, 머리가 지끈거린다. 와타나베가 초원의 풍경을 기억하지만 나오코를 잊어버리는 것과 똑같이 나도 '그 충격적인 말'은 기억하지만 누가 그 말을 해줬는지 기억을 하지 못한다. 그렇기에 내가 <노르웨이의 숲>에 집착한 것 같다. 처음으로 이 소설을 다 읽었을 때 내용이 워낙 난해한지라 다시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는 면도칼을 손에 긋고 자살했으며, 레즈비언인 13살 피아노 제자, 돌연 사라져 버린 특이한 캐릭터 돌격대, 떡밥을 너무 뿌려서 죽을 것이라고 예상하긴 했으나 다음 페이지 첫 문장부터 죽어버린 나오코(말 그대로 죽어 버렸다.)를 포함한 난해하고 재밌는 사건들이 읽을 때마다 다시 전해지는 이야기같이 새롭게 느껴진다. 책을 처음 읽을 때는 '이렇게 끝난다고?'라는 생각만으로 후유증이 강하게 남았지만, 지금 나에게는 '상실'에 대한 섬뜩한 느낌만이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