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일곱부터 스물셋까지, 가장 빛나는 나이라면서요,
이모부라고 한때 불렀던 사람의 더러운 손길
그것이 내 세상이 무너지는 첫 순간이었다.
잠자는 순간을 틈탔던 그 미물의 행동은
가족이라는 이름에 금을 가게 만들었고
나는 방황하게 되었다.
엄마마저도 나를 이해해주지 않아 떠돌던 나의
처음의 기억은 친한 언니와의 만남,
두 번째 기억은 그 언니를 성추행으로부터 구해줬다던 이야기
셋째는 다 같이 밥을 먹은 기억
넷째는,
나는 그렇게 퇴진시위가 한참이던 주말, 시위에 참여하기 위해 잠시 머물렀던 그 방에서,
좋아하는 닭발을 사준다는 그 자리에서, 처음으로 마시는 소주를 억지로 원샷하다가
소중히 아껴두었던 나의 몸과 마음이 발가벗겨져 진창을 구르는 경험을 하고야 말았다.
너와 나만 아는 이야기로 두면 된다는 얘기를 들으며,
어디로 가야 집으로 갈 수 있을지를 몰라 모든 말에 웃으며 끄덕이고선,
아픈 배를 부여잡고 이 공간을 나가 집으로 갈 길을 알려주기만을 바라며
그렇게.
나의 불행은 시작되었다.
-
차마 집으로 돌아가지 못해 할머니집으로 향하며
어제까지 함께했던 그 언니에게 전화 걸어 울면서 타던 지하철,
눈물에도 씻기지 않는 죄책감과 역겨움을 안고
돌아간 그곳엔 더럽혀진 나와 다르게 여전히 같은 모습으로 나를 사랑하시는
손녀 왔냐며 밥부터 챙기시는 다정한 할머니가 계셨다.
평소였다면 그냥 먹었을 할머니 밥
한 숟갈도 내 입으로 들어오는 모든 것들이 싫어
토하고 또 토하며 협박과 회유를 들었었다.
그렇게 일주일,
애가 통 이상하다는 할머니의 말씀에 모인 가족들에
무릎 꿇고 울면서 토로했던 나의 더러움.
모두가 알게 되지 않았으면 했던 그날의 기억은
나를 지키려는 모두가 아는 기억이 되었다.
경찰서를 다녀오고 검사를 만나면서 덜덜 떨던 나의 인터넷 이름은 ’ 꽃뱀‘
말하지 않고 합의금을 얻으려 고소했기에 나는 꽃뱀이랬다.
다들 그 짐승의 얘기를 믿으면서
미자 한 번 따먹은 사람이 나라는 얘기를 시시덕거리면서
나를 그렇게도 더럽혔다.
절대 합의는 없다는 나의 말에 뒤로 합의 좀 해달라고 연락을 취하면서
나는 그렇게 꽃뱀으로 남아 계속해서 그날에 살고 있었다.
모든 정신병을 다 얻은 채로.
계획적으로 술에 취해 말도 못 하는 내게 좋다는 말을 내뱉으라 시키며
아프다고 울부짖는 나의 목소리를 녹음해 증거라고 내놓으며
본인이 되려 피해자라는 사람의 형량은 겨우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
그들 말로는 스무 살까지 꽃뱀이었던 나는
그들에게 내가 승소했다는 소식이 다 알려졌었음에도
단 하나의 사과도 받지 못했다.
수많은 시도 끝에도 살아남아있어 그저 숨 쉬던 나에게
다시 뮤지컬이라는 꿈을 일깨워준 친구 덕에 들어간 대학.
나의 이야기로 쓴 시나리오가 현실성이 없다고 다들 웃었지만
나는 혼자 웃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1년이 지나고, 이제 하고 싶은 걸 하며 사는 삶의 행복을 알 때쯤
고의로 나를 다치게 한 한 사람 덕에 모든 목표가 접힌 채로 병원에 갇혔었다.
병명은 햄스트링 파열.
7주간의 입원이 끝나고, 혼자 재활을 하며,
이미 늦어버린 학점의 미련을 버리고 아빠의 부담을 덜려 그동안 했던 알바 경험을 토대로
카페 직원으로 입사를 했었다.
8시간이 넘는 시간을 1주가 안되었을 무렵 혼자서 보라고 지시를 받고,
튀김기의 누진세가 아까우니 배전반으로 전원을 켜고 끄라는 지시를 받고,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그저 과장이 내린 그 지시를 점장에게 배우며 일을 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평범히 출근해 오픈 준비를 하던 내게
배전반 안으로 손이 말려들어가 온몸이 잠시 굳었다 심장이 말리는 느낌에 주마등조차 보지 못한 감전사고가 일어났다.
그렇게 알게 된 지시사항의 문제와 안전장치 미설치,
과장에게 따졌지만 과장은 ‘남자들은 살면서 한 번쯤 다 감전당해 본다 ‘며 아무렇지 않은 일이니
일하고 있으면 본인이 오겠다 했고
나는 그렇게 감전 후에도 한 손으로 일을 하며 주문을 받아냈다.
한참을 오지 않는 과장과 점점 아파오는 팔과 심장.
가벼운 거라는 그의 말과는 달리 내 상태는 심각해져만 갔고
도착한 그는 나를 화상병원에 데려갔지만 모두 위험할 수 있으니 대학병원에 가라는 말 뿐이었다.
제발 숨이 안 쉬어진다며 데려가 달라했던 대학병원,
차를 끌고 온 환자라 위급으로 들어가지 못해 쓰러질 때쯤 들어간 나는
코로나 덕에 바로 진료를 보지 못하고 나와 일주일을 보내야만 했다.
첫째 날, 사장까지 달려와 책임지겠다고 했다.
둘째 날, 팔이 너무나도 아파오더니 스치는 바람에도 고통이 일었다.
셋째 날부턴 더는 참을 수 없어 매일을 울었다.
예약이 되었던 대학병원 신경과 교수의 말은 그냥 통증.
입원하라는 말에 입원을 하고 가라앉지 않는 통증에 무자비하게 투약받은 마약성 진통제 중에는
펜타닐이 있었다.
패치로, 구강정으로, 수액으로.
모든 방법으로 마약이 들어오니 공황장애가 오며 온몸을 손톱으로 찢어버리고 싶었다.
무서워진 나는 제발 나가게 해 달라 빌었고 그렇게 도망치듯 나온 나에게
첫째 날의 그들은 산재 등록 후 어느 순간 연락하나 없이 폐업으로 도망을 쳤고
방법이 없던 나는 매일 진통제를 먹으면서 전기로 지지고 불로 태우고 칼로 저며버리는 듯한 통증을 참으며 지낼 뿐이었다.
어느 날 근로복지공단의 부름에 자문의와의 대면을 할 때
고통으로 못 움직이는 나를 보던 담당 공무원님이
처음 듣는 이름의 병을 말해주기 전까지.
그 병의 이름은 ‘복합부위 통증증후군, CRPS’였다.
서울대, 가톨릭대가 아니면 판정받을 의사도 없는 이 병의 이름을 듣고
엄마와 나는 바로 병원을 찾아 예약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매일을 울며 소리 지르고 내 몸을 내려쳐가며 지내왔기에
가족들도 나도 지쳐있을 무렵이었으니까.
그렇게 한 달여 간의 검사를 마친 뒤 내려진 확진.
스물셋, 3월의 일이었다.
암환우들이 받을 수 있는 산정특례가 같이 적용되는 병.
희귀 난치병 환자로 영원히 남게 된 첫 순간이었다.
네? 제가요?
말할 새도 없이 찾아오는 고통에 얼추 예상하고 있었지만
진정 그 결과를 마주했을 때의 기분은 정말, 말로 다 할 수가 없었다.
스물셋, 어느 노래 따라 이랬다 저랬다 내가 어떤지도 모를 나이.
무얼 할지 하고 싶은지 찾아가고, 공부하고, 부딪히고, 깨져가며 살아가는 나이.
나는 그 모든 것을 송두리째 빼앗긴 기분이었다.
다시는 뮤지컬을 할 수 없다는 사실과 함께
다시는 멀쩡히 살 수가 없다는 것은
신이 나를 버린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