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문턱에서

나의 고백

by Henri

나는 한동안 존재에 대해 생각하지 않았다.


존재는 늘 거기에 있었고, 질문은 그 위에서만 시작된다고 여겼다.


어떻게 살 것인가,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어디에서 멈출 것인가.


이 질문들은 분명 중요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모두 비슷한 바닥 위에서만 움직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정작 묻지 않았던 것은
왜 여기 있는가가 아니라,


여기에 있다는 말이 무엇을 가리키는가에 관한 일이었다.


플라톤의 동굴 이야기를 다시 떠올리게 된 것도 그 무렵이다.


나는 그것을 더 이상 무지에서 지식으로 나아가는 서사로만 읽지 못했다.


밖으로 나간다는 것은
더 정확한 설명을 얻는 일이 아니라,


지금까지 충분하다고 여겼던 세계가
사실은 임시적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견디는 일에 가까웠다.


그 견딤은 종종 보람보다 고립에 닿아 있었다.


그러나 바깥이 모든 것을 해결해 주지는 않는다.


칸트는 이 지점에서 사유를 멈춰 세운다.


우리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알 수 없고,
그 한계를 넘어설 수도 없다고 말한다.


이 생각은 처음엔 사유를 정돈해 주는 듯하지만,
곧 다른 부담을 남긴다.


확실히 알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우리는 여전히 판단해야 하고,


그 판단의 결과를 떠안아야 하기 때문이다.


자유는 증명되지 않지만,
없다고 말하기에도 너무 많은 것을 전제로 한다.


그래서 도덕은 설명이 아니라
요구의 형태로 먼저 다가온다.


니체를 읽으며 나는
철학이 더 이상 나를 안전한 곳으로 데려다주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는 위로 대신 집요한 질문을 던진다.


왜 우리는 진리를 필요로 하는가.


왜 삶은 늘 정당화되어야 하는가.


도덕의 기원을 추적하는 그의 방식은
불편할 만큼 솔직하다.


신의 죽음 이후에 남는 것이 허무가 아니라
우리 자신이라는 말은


처음엔 과장처럼 들렸지만,
곱씹을수록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이제 책임을 대신 떠맡아 줄
초월적 이름이 없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삶을 긍정하라는 말은 여전히 어렵다.


그 말이 틀렸기 때문이 아니라,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하이데거는 이 어려움을
삶의 내용이 아니라 방식에서 찾는다.


우리는 대체로 이미 정해진 해석들 속에서 산다.


이미 쓰이고 있는 말들,
이미 무난하다고 여겨지는 선택들 속에서.
죽음은 그 흐름을 멈춰 세운다.


공포 때문이라기보다는,


그 앞에서는 대신 살아줄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더 이상 미룰 수 없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때 비로소
나는 설명자가 아니라 당사자가 된다.


그러나 이런 사유조차도
여전히 ‘나’의 궤도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레비나스를 읽으며 나는 그 점이 마음에 걸렸다.


타자의 얼굴은 이해를 기다리지 않는다.


그것은 먼저 다가와
아무런 준비도 없는 나에게 책임을 요구한다.


이 책임은 선택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이미 시작되어 있었고,
거부한다고 해서 사라지지도 않는다.


그래서 윤리는 늘 과도하다.
항상 늦고, 항상 부족하다.


그럼에도 우리가 완전히 무너지지 않는 이유는


어쩌면 바로 그 불충분함을
끝까지 의식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나는 이제 철학이
삶을 정리해 준다고 말하기를 조금 망설인다.


오히려 철학은
삶을 쉽게 지나치지 못하게 만든다.


익숙한 판단 앞에서 걸음을 늦추게 하고,


내가 정말로 내 몫의 삶을 살고 있는지
확인하지 않고는
다음으로 넘어가지 못하게 만든다.


삶의 문턱이라는 말은
거창한 순간을 가리키지 않는다.


그것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하루 속에서


당연하다고 여겼던 질문 하나가
갑자기 무게를 갖는 순간이다.


그리고 그 무게를 느끼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삶은 선명해지기보다는
오히려 조심스러워진다.


나는 이제
그 조심스러움이야말로


철학이 우리에게 남기는
가장 현실적인 흔적이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다.


확신보다는

멈춤에 가까운 태도 말이다.

삶의 어떤 멈춤의 순간에서…


Henri


화, 목, 토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