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명받는 삶
이 질문을 오래 붙들고 있으면,
그것은 이론이 아니라 생활의 감각처럼 다가온다.
우리는 살아 있으면서도 자주 스스로에게 묻는다.
왜 여기에 있는지,
무엇을 위해 이 하루를 건너야 하는지.
살아 있다는 사실은 분명한데,
그것만으로는 왠지 충분하지 않다는 기분이 따라붙는다.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
나는 이미 존재한다.
설명 이전에 도착해 있는 상태다.
그러나 곧바로 하루의 요구들이 시작된다.
해야 할 일, 증명해야 할 자리, 책임져야 할 역할.
그렇게 존재는 조용히 뒤로 밀리고,
삶은 일정과 성과의 언어로 재편된다.
숨은 호흡이 아니라 계획이 되고,
하루는 체온보다 숫자에 가까워진다.
왜 우리는 이렇게 쉽게 존재를 조건화하는가.
아마 인간은 공백을 견디기 어려운 존재이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 의미도 붙지 않은 시간 앞에서
우리는 불안해진다.
그래서 삶에 목적을 얹고, 세계에 설명을 덧붙인다.
설명은 혼란을 정리해 주는 도구이자,
우연을 견딜 수 있게 만드는 심리적 장치다.
그것은 진리를 향한 통찰이라기보다,
불안을 다루는 기술에 가깝다.
그러나 설명이 많아질수록 삶이 반드시 깊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반대의 순간도 자주 찾아온다.
직함이 사라지거나 관계가 끊기거나 성취의 무대에서 내려오는 날,
우리는 갑자기 자신이 텅 빈 것처럼 느낀다.
그때 깨닫는다.
우리가 붙들고 있던 것은 존재 자체가 아니라,
존재를 둘러싼 역할과 표식이었음을.
나는 가끔 아무 목적 없이 창가에 앉아 하늘을 바라본다.
구름은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 설명하지 않고,
빛은 왜 그렇게 떨어지는지 해명하지 않는다.
그들은 다만 그 자리에서 움직이고, 변하고, 사라진다.
그 단순한 리듬 앞에서
인간의 삶은 유난히 복잡해 보인다.
우리는 살아 있으면서도
끊임없이 자신에게 이유를 요구한다.
어쩌면 존재가 설명을 요구받는 이유는,
우리가 침묵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유 없이 머무는 시간,
아무 목적 없이 숨 쉬는 순간을 불안해하며
서둘러 의미를 덧입힌다.
그렇게 삶은 정리되지만, 동시에 숨이 막힌다.
질서는 생기지만, 체온은 줄어든다.
그래서 나는 가끔 설명을 내려놓는 연습을 한다.
지금 이 순간을 해석하지 않고,
다만 지나가게 두는 일이다.
박동의 리듬을 느끼고,
숨이 오가는 흐름에 잠시 몸을 맡기는 것.
그 짧은 정지 속에서
존재는 다시 제 무게를 회복한다.
이유 없이도 충분하다는 감각.
살아 있음 자체가
이미 하나의 완결된 상태라는 조용한 확신이 스며든다.
결국 이 질문은 이렇게 되돌아온다.
존재는 왜 설명을 요구받는가.
그것은 존재의 결핍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불안을 견디는 방식 때문일 것이다.
불안이 잠시 가라앉는 순간, 우리는 알게 된다.
설명이 사라진 자리에서도
삶은 계속 숨 쉬고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 숨결 하나만으로도,
존재는 이미 충분하다는 것을.
이 순간 다시 한번 나에게 묻는다.
내가 나인 것을 증명할 '서류'를 잃어버린다면,
나는 어제보다 적게 존재하는 것인가...
Hen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