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라는 통로, 그 실존의 기록
나는 가끔 숨을 고르며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는 이 삶을 운행하는 주인인가,
아니면 흐르는 시간 위를 잠시 건너는 가교에 불과한가.
아침의 빛은 늘 나보다 먼저 도착한다.
창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햇살은 내 결심을 기다리지 않고,
시계의 초침은 마음의 속도와 상관없이 제 갈 길을 간다.
나는 하루를 ‘시작한다’고 말하지만,
실은 이미 움직이고 있던 세계 안으로
뒤늦게 발을 들이는 쪽에 가깝다.
태어난 자리도, 이름도, 이 몸 역시
내가 고른 것은 아니었다.
나는 언제나
누군가 써 내려가던 문장의 중간에서 눈을 뜬 존재처럼 살아왔다.
그럼에도 나는 삶을 붙잡으려 한다.
방향을 세우고 계획을 만들며,
스스로를 주체라 부르고 중심에 서 있으려 애쓴다.
그 손에는 종종 불필요한 힘이 들어간다.
놓치지 않으려는 마음이 커질수록 손마디는 굳어가고,
그 긴장 속에서 나는 쉽게 지친다.
그러다 문득 깨닫는다.
나는 삶을 소유하는 사람이 아니라,
삶이 지나가는 자리라는 것을.
세상은 쉼 없이 나를 스친다.
타인의 말이 지나가고,
계절이 몸을 건너며,
기쁨과 상실이 번갈아 머문다.
나는 그것들을 붙잡아 둘 수 없다.
다만 통과시키는 방식만큼은 선택할 수 있다.
거칠게 흘려보낼 수도 있고,
잠시 품었다가 조용히 놓아줄 수도 있다.
아마도 주체란 지배자가 아니라,
깨어 있는 통로에 가깝다.
일어난 사건을 바꾸지는 못해도,
그 앞에 서는 태도만큼은 스스로 조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세상은 늘 나에게 말을 건다.
어떤 날은 상처의 언어로,
어떤 날은 아무 말 없는 침묵으로.
나는 그 앞에서 매번 작은 응답을 선택한다.
그 사소한 결정들이 겹겹이 쌓여,
어느새 나라는 윤곽을 만든다.
통과 지점이라는 자각은
나를 왜소하게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삶을 덜 무겁게,
더 정직하게 바라보게 한다.
내가 세계의 중심이 아니라는 사실,
거대한 흐름 속에서
잠시 빛을 통과시키는 창 하나에 가깝다는 인식은
마음의 자세를 바꾼다.
성취 앞에서는 자연스레 고개가 낮아지고,
실패 앞에서는 숨을 조금 더 길게 쉬게 된다.
그래서 나는 두 자리를 함께 산다.
선택하는 존재로서의 나, 흘러가는 존재로서의 나.
붙잡는 손과 놓아주는 손을 동시에 지닌 채 균형을 배운다.
이 불완전한 균형 위에서
인간은 비로소 자기 자리를 얻는다.
오늘도 시간은 나를 앞질러 흐르고,
나는 그 흔적을 따라 걷는다.
그러나 문득 걸음을 멈추고 내 안의 고요를 바라보는 순간,
나는 다시 삶의 중심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아주 낮은 목소리로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는 지금, 이 흐름을 어떻게 건너고 있는가.
이 질문이 사라지지 않는 한,
나는 비록 하나의 통로일지라도
여전히 나의 삶 안에 머물며 살아가고 있다.
Hen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