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는 고유한가, 반복되는가

반복은 시간의 정체가 아니라, 깊이를 만드는 도구다

by Henri

가끔 숨을 고른다.

들숨이 끝나고 날숨이 시작되기 직전,

그 짧은 공백 속에서 질문 하나가 조용히 떠오른다.

존재는 고유한가, 아니면 반복되는가.

이는 답을 요구하는 물음이라기보다,

잠시 멈추라는 신호다.

발걸음을 늦출 때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

하루의 표면 아래 미세하게 뛰는 삶의 맥박.

그 진동 속에서 존재는 서서히 윤곽을 드러낸다.


나는 ‘나’라는 존재가 이 우주에 단 하나뿐이라는 감각을 안고 산다.

내가 통과한 시간, 견뎌낸 밤, 기억하는 떨림과 침묵.

비슷한 풍경은 있을지언정, 같은 체온은 없다.

삶은 되돌릴 수 없는 방향으로 흐르고,

우리는 그 위에 단 한 번의 흔적을 남긴다.

그래서 존재는 철저히 단독적이다.

누구도 대신 살아줄 수 없고, 누구도 완전히 대체할 수 없다.

이 사실 앞에서 나는 작아지면서도 깊어진다.


그러나 시선을 넓히면 다른 장면이 겹쳐진다.

아침의 빛, 규칙적인 호흡, 익숙한 거리의 소음, 다시 오는 저녁의 어둠.

우리는 거대한 반복의 리듬 속에서 하루를 건넌다.

태어나고 배우고 사랑하고 상실하며 다시 시작하는 궤적은

인간의 몸에 새겨져 왔다.

이 반복은 나를 개인의 경계 너머로 데려가,

수많은 타인의 삶과 연결한다.


나는 홀로 서 있지만, 동시에 이어지는 연쇄의 일부다.

하지만 이 반복은 결코 복제가 아니다.

오늘의 해는 어제와 같은 자리에서 떠오르지만,

그 빛을 맞는 얼굴은 이미 달라져 있다.

어제의 피로와 오늘의 기대, 스친 생각 하나, 바람의 온도조차

나를 미세하게 이동시킨다.


반복은 껍질일 뿐, 고유함은 그 안에서 숨 쉬는 결이다.

삶은 비슷한 장면을 되풀이하지만,

매 순간 다른 숨결로 흔들린다.

이 지점에서 존재를 고정된 형상이 아니라

흐르는 사건으로 이해한다.

우리는 어제의 나를 반복하면서도 조금씩 벗어난다.

같은 질문을 붙잡아도 그것을 쥔 마음의 온도는 달라져 있다.

같은 실패를 만나도 그 무게는 이전과 같지 않다.


반복은 나를 묶는 사슬이 아니라, 고유함이 자라나는 토양이다.

고유함과 반복은 대립이 아니다.

오히려 서로를 비추는 거울이다.

반복이 없다면 고유함은 허공의 그림자에 불과하고,

고유함이 없다면 반복은 생명 없는 순환으로 굳는다.

우리는 이 두 힘 사이에서

위태롭지만 아름다운 균형을 잡으며 걷는다.


비슷한 하루를 살아가되,

그 하루를 건너는 보폭과 호흡은 매번 다르다.

그 미세한 차이가 삶을 단순한 시간의 소모가 아니라

하나의 이야기로 만든다.


나는 가끔 상상한다.

존재란 반복이라는 강 위를 건너는 단 하나의 배라고.

강물은 끊임없이 흐르며 비슷한 물결을 되풀이하지만,

항해는 오직 한 번뿐이다.

우리는 그 위에서 길을 잃기도 하고,

뜻밖의 별빛을 발견하기도 하며,

침묵 속에서 자신을 다시 만난다.

그 모든 궤적이 쌓여 어제와 닮았으나

결코 동일하지 않은 오늘의 나를 빚는다.


그래서 오늘도 숨을 고르고,

이 반복되는 하루 안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그 들어감은 어제와 같지 않다.

같은 문을 통과하지만, 매번 다른 얼굴로 나온다.

이 사실을 알아차리는 순간,

삶은 조금 느려지고,

한 뼘 더 깊어진다.


이 순간 어리섞은 물음을 다시 해본다.

"매일 똑같은 문을 열고 집을 나서는데, 어째서 우리가 도착하는 세상은 매번 어제와 다른가"


Henri

화, 목, 토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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