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간 삶들이 쌓인 지층 위에서
밤에 혼자 앉아 있으면 가끔 기묘한 감각이 밀려온다.
이 방에 나 혼자만 있는 게 아니라는 느낌.
소리도, 형체도 없이 여러 개의 내가 이 좁은 공간을 서성인다.
이미 지나간 얼굴, 닫혀버린 눈빛을 하고서.
처음엔 지독한 외로움인 줄 알았다.
하지만 외로움이 텅 빈 결핍이라면,
이것은 지나가 버린 무수한 시간으로 차오르는 먹먹한 포만감에 가깝다.
삶은 단 한 번의 숨 멎음으로 끝나지 않는다.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수없이 많은 끝을 조용히 통과한다.
장엄한 의식도 없이 어느 날 일상의 문 하나가 닫히고,
아주 오랜 뒤에야 그 문이 다시는 열리지 않음을 서늘하게 깨닫는다.
누군가를 열렬히 사랑했던 시절의 나는,
그 관계의 종말과 함께 완전히 매장되었다.
그와 눈을 맞추던 고유한 방식, 그에게만 허락했던 다정한 목소리, 우리 사이의 침묵 언어
그 모든 세계가 허물어졌다.
그 시절의 나는 결코 돌아올 수 없는 형태로 끝났다.
포기한 꿈, 무너진 믿음, 두 번 다시 발을 담글 수 없는 시간의 강물.
헤라클레이토스가 응시했던 그 흐르는 강은 아득한 고대가 아니라,
매일 아침 내가 마주하는 거울 앞에서도 쉼 없이 소용돌이치고 있다.
이상한 건,
그렇게 끝난 삶들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의식의 밑바닥에 가라앉아 보이지 않는 층위를 이룬다.
그러다 햇빛이 꺾이는 찰나의 각도,
프루스트의 찻잔 속에서 피어오르던 희미한 냄새 하나에 속수무책으로 떠오른다.
과거가 현재를 무례하게 침범하는 게 아니다.
현재의 내가 무심코 과거의 틈을 여는 순간, 잃어버린 시간들이 와락 쏟아진다.
기억은 박제된 유물이 아니라, 피부 아래에서 맥박 치는 생명체다.
지나간 수많은 나는 유령처럼 방을 배회한다.
불을 밝혀도 도망치지 않고 오히려 또렷해진다.
니체의 영원회귀를 가만히 뒤집어본다.
무한히 반복될 미래의 막막함보다,
단 한 번 지나가면 결코 되돌릴 수 없는 과거의 절대성이 훨씬 더 무겁고 잔인하다.
“만약 그때 달랐더라면”이라는 덧없는 문장을 영원히 곱씹을 뿐,
단 1초도 되감을 수 없다는 참담한 진실.
어쩌면 그것은 생물학적 죽음보다 더 완전한 종말이다.
그렇기에 찢겨나간 과거를 삶의 필연으로 끌어안는 일은 참혹하리만치 어렵다.
하지만 동시에 뼈저리게 안다.
무수한 상실의 시간이 없었다면 지금 여기 앉아있는 ‘나’조차 존재할 수 없음을.
매 순간 다른 물결로 흐르는 강물처럼,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타인만큼이나 아득히 멀다.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매 순간이 곧 탄생이자 죽음이다.
지나간 껍질에 대한 미련을 놓을 때,
세계에 덩그러니 내던져졌다는 사르트르의 쓸쓸한 문장은 오히려 깊은 위안이 된다.
끝난 사건은 바꿀 수 없어도 그 의미는 아직 단 한 줄도 완성되지 않았다.
지금의 내가 지나온 궤적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처참했던 실패는 도약의 굴절점이 되고 찬란했던 기억은 짙은 여운으로 남는다.
지나간 삶들은 현재의 나와 끊임없이 눈을 맞추며 대화하는 살아있는 시간이다.
내 등 뒤에 버려진 게 아니라 고스란히 내 안에 융해되어 있다.
지금 이 자리에서 가만히 호흡을 고른다.
무수한 삶과 죽음이 지층이 되어 두 발아래 켜켜이 쌓여 있다.
어떤 지층은 바위처럼 단단하고, 어떤 층은 진흙처럼 위태롭게 흔들린다.
그 불안정한 지층 위를 기어코 걷고 또 묻는 것.
그것이 살아있음의 증명이다.
죽음 같은 끝이 쌓일수록 나는 무너지는 대신 조금씩 더 높은 곳으로 솟아오른다.
지나간 상실들이 나를 비로소 여기까지 업어다 놓았다.
내 발밑의 시간들은 폐허가 아니라,
내가 우뚝 서 있는 거룩한 대지다.
나는 몇 번의 끝난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분명한 건,
오직 지금의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만큼의 무게라는 사실이다.
그 묵직한 하중을 기꺼이 느끼며,
언젠가 마지막 문턱에 다다랐을 때 비로소 이것으로 충분했다고 고요히 미소 지을 수 있기를.
지나간 무수한 나를 딛고 서서, 오늘도 뚜벅뚜벅 살아간다.
지금은, 오직 그것으로 충분하다.
Hen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