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나를 늙히는가, 드러내는가

나이테와 거울

by Henri

오래된 나무를 베면 나이테가 드러난다.

손가락으로 원을 따라가다 멈추는 순간, 문득 묻는다.

이것은 상처인가, 기록인가.

나무는 세월에 닳은 것인가, 아니면 시간을 삼키며 이 두께에 이른 것인가.


그 물음이 가슴으로 옮겨오는 순간 깨닫는다.

이 질문이 나무에 관한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거울을 너무 오래 들여다보면 얼굴이 낯설어진다.

익숙한 것이 지나치게 오래 머무르면 낯선 것이 된다.

그 낯섦 속에서 조용히 떠오르는 물음.

나는 세월이 남긴 흔적을 보는가,

아니면 그동안 가려져 있던 무언가를 보는가.


두 물음은 닮았지만 전혀 다른 삶을 품고 있다.

한쪽에서는 나는 조금씩 줄어드는 존재이고,

다른 쪽에서는 천천히 완성되어 가는 존재다.


같은 주름도 어느 편에 서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한다.

어떤 이는 젊음을 잃었다고 말한다.

세월은 감산이고, 현재는 과거의 열등한 사본이다.

그 독법에 물들면 삶 전체가 과거에 빚진 시간이 된다.


시간은 적이거나, 최소한 무심한 소멸의 집행자다.

그러나 강물을 생각하면 다른 장면이 떠오른다.

시간 속에 잠긴 돌멩이라면 강물은 나를 깎아낸다.


하지만 시간 속에서 살아가는 물고기라면

시간은 내가 잠긴 매질이 아니라 내가 헤엄치는 방식이다.

나이 든다는 것은 원래의 나로부터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나를 향해 이동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모래시계는 모래가 줄수록 떨어지는 알갱이가 더 선명해진다.

유한함은 현재를 침식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를 더 살아 있게 한다.

나는 오래전부터 시간을 ‘흘러가는 것’보다 ‘쌓이는 것’으로 느꼈다.


잘게 쪼개 잴 수 있는 시간이 아니라, 녹아들고 축적되는 시간.

눈덩이처럼. 굴러갈수록 작아지지 않고 더 커진다.

지나온 여름, 실패한 관계, 틀렸던 확신들까지 모두 지금의 나 안에 조용히 녹아 있다.


오래된 음악을 다시 들을 때 우리는 그것을 몸으로 안다.

같은 곡인데 다르게 들린다.

곡이 변한 것이 아니라, 듣는 내가 더 많아졌기 때문이다.


주름은 지워진 것이 아니라 새겨진 것이다.

대리석 속 형상은 처음부터 있었다.

조각가는 불필요한 부분을 제거할 뿐이다.


나이 들수록 우리는 많은 가면을 벗는다.

두려움으로 붙잡았던 욕망, 타인의 시선으로 유지했던 태도, 방어였던 신념들.

손실처럼 보이는 그 과정이 실은 과잉의 제거일 때가 많다.


물론 시간은 모두에게 공평하게 드러냄을 주지 않는다.

기억이 무너지고 몸이 배신하며 사랑하는 이가 먼저 떠나는 이에게

“드러내고 있다”는 말은 잔인할 수 있다.


시간은 동시에 조각하기도 하고 침식하기도 한다.

몸이 닳는 동안 내면이 맑아질 수 있고,

잃으면서 잃어서는 안 될 것을 알게 될 수도 있다.


나이테로 돌아온다.

가뭄의 해는 좁고, 풍요의 해는 넓다.

그러나 좁은 나이테가 나쁜 나이테는 아니다.

그것은 그 해의 날씨가 나무 안으로 들어온 흔적이다.

나무는 그 기록들 때문에 약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단단해지고 읽힐 수 있게 된다.


시간은 나를 늙히는가, 드러내는가.

아마 둘 다일 것이다.

어느 쪽을 더 깊이 바라보느냐가

내가 어떤 시간을 사는지를 결정한다.


거울 앞에서, 나이테 앞에서, 오래된 음악 앞에서.

그 선택은 매번 다시 찾아오고, 매번 다시 할 수 있다.

그것이 시간 앞에서 우리에게 허락된 가장 조용한 자유다.


사유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자유를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유가 지금 여기 있다는 사실을 잠시 기억하게 하는 것이다.


기억하는 순간, 사람은 이미 조금 달라져 있다.

그 달라짐이 아무리 작더라도.

나이테 하나가 나무의 한 해를 담듯이.


Henri

화, 목, 토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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