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경을 닦는 법
빛이 유리를 통과할 때, 유리는 자신이 빛을 왜곡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본다고 믿지만, 그 시선은 경험, 언어, 상처와 애정이 쌓인 렌즈를 통과한 것이다.
문제는 유리처럼 우리 역시 그 사실을 잘 모른다는 데 있다.
편견을 도덕의 문제로만 보는 것은 오해다.
그것은 나쁜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 조건의 일부다.
살아 있는 존재는 패턴을 배우며 지혜를 얻지만, 그 과정에서 한 번의 상처가 집단 전체로 확장되기도 한다. 지혜와 편견은 같은 뿌리에서 나온다.
뿌리를 뽑는 대신, 한쪽이 다른 쪽을 잠식하지 않도록 살피는 것이 편견과의 싸움이다.
우리의 '안경'은 세 겹의 먼지로 흐려진다.
언어를 배우기 전 세계를 기억하지 못한다.
말은 세계를 분절하며, 이름이 있는 감정은 더 선명해지고 없는 것은 희미해진다.
언어는 창이자 액자다.
기억은 감정의 편집자다.
강렬한 경험은 남고 평범한 것은 옅어진다.
한 번의 상처가 수많은 만남을 왜곡한다.
집단에 대한 인상은 객관적 평균이 아니라 감정이 선별한 잔상이다.
믿음이 자리 잡으면 자신을 지키려 한다.
지지 증거는 받아들이고 반박은 예외로 치부한다.
"저 사람은 달라"는 말은 기존 믿음을 보호하는 장치다.
반박 불가능한 믿음은 지식이 아닌 신앙이 된다.
안경을 닦는 일은 어디서 시작되는가?
소크라테스의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처럼, 자신이 안경을 쓰고 있음을 인정하는 데서.
이는 과거 판단의 불완전함을 받아들이는 자아의 내려놓음이다.
흐릿함의 불편을 견디는 것이 핵심이다.
레비나스는 윤리가 타자의 얼굴에서 시작된다고 했다.
사람을 범주로 볼 때 집단 윤곽이 채워지지만, 얼굴로 볼 때 구체적인 한 사람이 보인다.
편견의 해독제는 추상이 아닌 구체, 주의를 어디에 두는가의 문제다.
완전한 객관성은 '신의 시선'으로 인간에게 불가능하다.
우리는 언제나 특정 위치에서 본다.
중요한 것은 내 시선의 한계를 인정하고 다른 각도를 받아들이는 것.
소설은 이 일을 깊이 수행한다.
'죄와 벌'처럼 낯선 의식을 경험하면 범주에 균열이 생긴다.
낯선 삶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이해를 향한 몸짓이 렌즈를 맑게 한다.
안경 닦기는 끝나지 않는다.
먼지가 쌓이면 다시 닦아야 한다.
자신의 안경이 더러울 수 있음을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 사이에는 독단과 사유의 경계가 있다.
할머니가 유리를 닦고 창밖을 바라보듯, 닦음은 선명함의 기쁨과 이전 흐림의 쓸쓸함을 함께 가져온다.
빛은 오늘도 유리를 통과한다.
우리는 그 사실을 가끔 알아차릴 수 있고, 그 순간을 놓치지 않으려 노력하며 서로를 더 있는 그대로 본다.
Hen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