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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래연 Jun 03. 2020

저질러진 불행에 대해 보류하여야 할 표현, '끔찍한'





어쩌면, 끔찍해!     


               

끔찍하다는 표현은 누구에게 던져지는 것인가?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을 겪은 이의 경험을 두고 끔찍하다고 표현한다면, 그 사건은 끔찍한 일로, 그리고 사건 피해 당사자는 끔찍해져 버린 사람으로 고정되어 버리는 것 같다.     



이런 표현에 대해 저항이 걸린다.

마치 이런 태도는, 묻은 것이 똥이든 겨든지 간에 하여간 무언가 묻지 말아야 할 무엇이 묻은 존재로서의 이미지를 당사자에게 씌우는 태도가 아닐는지?     



끔찍한 일을 당했다, 그 일은 끔찍하다,

"끔찍함"이란 라벨링은 어떠한 심리적 작용을 위하여 채택되는가?

혹시나 이런 표현을 사용하는 이면엔, '나는 그런 일을 당하지 않아서 다행이다.'가 도사려 있는 것은 아닌가?          



현실에서 불행은 사람을 딱히 가리지 않는다.

누구에게나 언제든 상황이 좋지 않게 돌아가면, 돌이키기 힘든 일들은 어디에서라도 일어날 수 있다. 인생 자체가 그러한 장이다. 도저히 일어나서는 안 되는 범주의 심각한 범죄까지도 사람을 가리지 않는 것이다. 조금 치우쳐서 다시 말하면, 그 언제라도 잠재적으로는 피해자가 될 수 있는 상황으로부터, 나는 오늘 요행이 빗겨 나 있는 것일 뿐이다.

그런데, 끔찍하다는 말의 뉘앙스에는, '저렇게 흉측한 일까지는 내게 일어날 리 없을 텐데'라는 근거라곤 없는 일말의 억측이 잠재하여 있다. 

즉, 고통이나 불행을 타자화하는 것이다. 나의 밖에, 심리적 안전거리를 의식해가며, 안도의 한숨을 쉬며, 무사안일한 나의 일상으로 돌아가기 위한 감정적 정리를 하는 말로 들리곤 한다, 끔찍하다는 말은.          



그리고 끔찍하다고 말해버리고 끝나면, 이 안 좋은 벌어짐의 상황으로부터 돌이키거나 바로잡을 것이 축소되거나 없어 보이는 효과를 초래한다. 차리리 '힘든 일' 정도로 말하는 게 적당해 보인다. 

힘든 일을 겪은 이가 누구건 그 일로 인하여 죽음을 택할 게 아니라면 계속 살아야 할 텐데, 남들이 포기한 숙명 같은 것을 걸머진 모습으로 각인되는 것은 옳지 않다. 도와줄 게 아니라면, 자신이라는 일개 관객의 정서를 씻어내기 위한 표현은 함부로 대놓고 할 일이 아니라 생각한다.      



무심히 던져지는 것들이 많고, 싫다. 이건 연민도 공감도 이입도 아닐 것이다. 

진짜 불행의 상당 퍼센티지는 당한 일 그 자체만큼이나 사람들의, 알고도 모르고도 던지는 입방정이나 시선에 기인할 것이다. 거기엔 오해나 오독이 도사려 있고, 이런 어그러진 태도는 힘든 일을 겪은 당사자에게 오명을 씌운다. 자신의 케이스가 공중에게 어긋난 진실로 인지되는 것이, 원 고통이 뭐였 건 못지않은 더한 고통일 수 있다.           


고통에 대한 어휘들의 사전을 가다듬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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