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은 샘플 세트다. 일상에서는 용량이 큰 로션과 샴푸와 샤워젤을 쓰는 반면에 어디선가 날아온 샘플들은 통상 방치되다가, 여행과 더불어 트렁크 속 오밀조밀한 우주에 탑승해서는, 먼 곳으로 날아간다.
샘플들을 다 써 간다. 같은 제품이라도 샘플로 쓸 때가 더 귀한 것 같다. 시식코너에서 아주 조금만 먹는 팽이 계란부침과 라면이 스스로 실컷 만들어먹을 때보다 맛나듯이. 시식코너 일하시는 분들은 항상 그랬다. 소금 후추 말고 다른 거 안 넣었어요.
남의 손에서 빚어져 조금씩만 제공되는 것들.
코코 샤넬은 리치 보헤미안처럼 호텔을 전전하며 살았다고 한다. 일상도, 샘플 통에 조금씩만 덜어 쓰듯 살면 좀 애틋해지려나? 하다가도, 그림자를 스파링 파트너 삼다 보면 하루하루가, 미처 쓰지 못하고 유통기한 초과로 버려지는 샘플 통처럼 되어버린다. 차라리 처음부터 없었다면 아쉽지도 않을 것을.
샘플 통 다 써서 하나씩 버려질 때마다 작지만 신났다. 작아질수록 아쉬워지는 존재로 등극한다 생각하면 이 커다란 나를, 귀 속에 쏙 들어가게 줄어드는 손오공의 여의봉처럼 어디 숨기고 싶어 진다. 숨바꼭질을 발명한 자를 발견해 체포해 패댕이 치고 싶다. 이거, 지구 최초의 사기꾼 아니냐고요?
잘 삐질수록 쉬 감염되는 숨바꼭질은 한편으로는 숨 참기 연습도 된다.
머리카락 보일라, 숨소리 들릴라.
초식동물들은 위가 길고 되새김질을 한다. 초식 인간은 역류성 식도염에 걸리기 쉽다.
믿으세요 늘 쫓겨나고 도망갈 준비가 되어 있다니까요, 초식 수컷이 배우자감을 설득시킬 때 하는 말. 최소한 내가 먼저 저세상으로 가는 일은 없을 거예요, 생존 연습은 제법 되어 있으니까요, 때론 씹던 풀도 누던 똥도 내팽개쳐야 해요 난 그런 것에 길들어 있으니까, 당신과 나의, 그러니까 곧 우리의 귀한 자식들에게 잘 도망치는 법을 가르칠 수 있어요.
자기 인생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는 말은 주변 최소 10km 반경내에 늑대나 사자가 없음을 전제한다. 치타까지를 고려하면 이 반경은 늘어나야 할지도 모른다.
늑대가 유인될 곳에는 말뚝에 묶인 당나귀 인형이 풀 죽은 듯 서 있다. 움직이지 않는 게 아니라 풀 죽어 꼼짝없어 보여야 함이 핵심이다. 그러다 늑대가 다가가면, 밟히자마자 곧장 작동하게끔 설계된 냅다 뒷발길질.
초식동물들에게 자신들을 쏙 빼어닮은 모형 동물을 만들어 파는 희대의 마리오넷 제작자인 진짜 당나귀는 기다란 귀 모자를 삐딱하게 돌려 쓴다. 주문이 밀렸네 밤샘해야겠어, 중얼거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