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토록 겨울의 삭풍을 그리워하기란 처음이었다. 꽃샘도 끝나고 훈풍이 꽃들을 불러올수록 우리의 눈사람은 코가 녹고 옆구리가 허물어져 갔다. 그렇다고 눈사람을 냉동고에 넣을 수도 없었다. 이제 레슨도 끝났으니, 그와 나의 둥지는 해체되었다. 공공의 미팅이 사라졌으니 이제 우연히 반복되는 조우를 위한 핑계도 없어졌다. 조연과 단역들, 그리고 배경조차도 쫑파티 이후엔 제자리로 돌아갔다. 애쓰지 않아도 저절로 다가오던 것들일랑은, 언젠가는 그들 자신의 바람 줄기를 잡아타고 떠나가게 마련인데 그 찰나에 그것을 조금이라도 잡아두는 법을 나는 모른다. 언젠가 다가온 것들 또한 자신의 고의가 아닌 무언가에 이끌려 내 앞까지 떠밀려 온 것이었을 테니, 우리 누구도 작별을 고하는 법 따위를 알 리가 없다. 그나마 다행은, 나는 약을 복용 중이었으므로 불면에 시달릴 일은 당분간은 없다는 것이었다.
잠시 짬을 내어 약을 받으러 가는 일은 약간의 휴식이 되었다. 어쩌면 그냥 그 병원의 위치와 인테리어가 맘에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의사와 면담 전에 기다리는 편안한 대기실엔, 적어도 겉으론 아무 질병의 징후도 드러나지 않는 방문객이 대부분이었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있었다.
한 번은 웬 여자애가 다른 대기자들에게 경계 없이 말을 거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테이블 위의 메모지들로 무언가를 구성하며 자가적인 놀이치료를 하고 있었다. 대학 갈 나이쯤 되어 보이는 그녀는 나를 예쁜 언니라 불렀다. 한 번은 밥을 사달라고 했다. 나는 그녀와 스테이크를 먹고 싶어 졌다. 그녀는 이미 최면치료도 여러 번 받았지만 여러 가지 증상들이 겹쳐 치료가 쉽지 않은 상태라고 했다. 의사는 그녀에게 영화나 책 같은, 일체의 정서적 자극을 유발할 매체들을 금지한 상태였다. 그래도 그녀는 메모지들을 가지고 잘만 놀았다.
몇 개의 겹쳐진 정신 이상에는 예기치 않은 기능도 덧붙여지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투시 능력자처럼 보였다. 범상치 않은 눈빛을 하고는 이렇게 말하였던 것이다. “언니, 예쁘게 입고 구두 신고 가끔 춤도 추네?” 많이 아프면 절반 무당이 되다시피 하여, 세상 안 틈새마다 도사린 수많은 세계들을 엿보게 되는가 싶었다.
레슨은 끝났지만 나는 주말에 계속 볼 일이 있었고 그때마다 여전히 밀롱가에 발 도장을 찍었다. 레슨의 효과가 휘발될 세라, 디아나의 특훈들을 세포에 속속 저장시켜 춤의 풍취를 발효 숙성시키고자, 로돌프 출신 땅게로들은 밀롱가를 휘저었다. 그들하고만 돌아가며 춰도 하나의 저녁을 채울 수 있었다. 몇 천 살리다와 수백 번의 히로 사이에서 내 옆구리와 허벅지는 점점 가늘게 다듬어져 갔다.
단지 이제는 내 편에서 그를 더 많이 의식한다는 사실 자체가 버거워졌다. 그가 정확히 내가 가까이 지낼 만한 사람인가 하면 그것은 오리무중이었고 게다가 나는 오래된 남자 친구가 있었다. 그동안의, 그와 나의 묘한 교감은 그저 허공에 지은 영혼의 둥지 같은 것이었으니!
그의 밀롱가 친구 발터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파비안 형, 어느 여자가 좋아하겠어?”
“글쎄, 좋아할 여자 많을 거 같은데?”
“물론 보이는 건 어트랙티브하지. 그런데, 여자란 좀 챙겨줘야 하잖아? 맨날 처박혀 그림이나 그리고 상대방은 도대체 케어라곤 하지 않는데 어느 여자가 옆에 있을려구 하겠냐구?”
그는 누구도 붙잡지 않나? 내가, 그가 쫒는 다프네가 되지 못할 바에야 내 편에서 얼른 먼저 달아나야만 할 것이다.
어쩌다 그 날 그와 함께 밀롱가를 나왔고 그가 나를 바래다주게 되었는지 모른다. 밀롱가를 나온 젠 탱고 동호회 수장 발터, 발레리나 지젤 그리고 그와 나 이렇게 넷은 편의점에 들러 둘씩 마주 본 채 따뜻한 커피와 핫초코를 마셨다. 지젤은 손이 곱고 아름다웠다. 내가 감탄하자 지젤은 “역시 손에 관심이 많으세요.”라고 했다. 나는 지난주 엄지 지문에 나타난 성격과 운명에 대해 발터의 게시판에 올렸었다. 파비안도 지젤도 아름다움에 민감한 땅의 지문이다.
그다음 주 돌아올 나의 생일을 앞두고 지젤은 활짝 웃으며 말했다. “파티해요, 생일방 해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