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움을 너무 미워하지 말기를

- 미움을 없애기보다는 정직하게 미워하라

by 래연





미워하는 일만도 마음에 부담이 가는 일이어늘, 자신이 누군가를 미워한다는 사실 자체를 자책함으로써 - 2차 미움이라 불러 본다 - 자기혐오라는 굴레에서 버둥이게 된다.


누군가는 미워하지 않을 수는 없으면서도, 이 감정을 공교롭고 못난 짐꾸러미처럼 여기기에, 들고 가지도 내려놓지도 못한다.

미워한다는 사실을 미워한다는 것은 마치 하나 더 보태어진 겹 그림자와도 같다.


사람이란 사랑하는 일에는 긍지를 갖고, 미워하는 마음을 품을 때는 마음이 불편하도록 프로그래밍된 결과라 보인다. 태어나면서부터였나? 여기에 어떤 연구가 가해졌는지 모르지만, 실제로 어떤지 몰라도 나의 생각엔 아마도, 교육의 효과가 더 크지 않을까 한다. 사회 전체, 가정과 학교 그리고 꽤나 직접적이었을 종교의 가르침들은 온통, 미워하지 말 것을, 미워한다는 감정 자체를 어떻게 제발 좀 분리수거할 것을 집요하게 요구, 실은 요구를 넘어 강제해왔다고 볼 수 있다.



인간 문명의 산물들이 자연을 옥죌 때 그것은 부자연스럽고 억지스럽다. 흔히들 그것을 인위라고 부른다.


인간 감정을 대하는 태도가 인위적이 될 때 그곳엔 결렬과 고통이 싹트게 되어 있다. 이 고통을 없애고, 어떻게든 소위 '선하다 혹은 바람직하다'라고 일컬어지는 방향으로 자신을 맞추어 놓으려 할 때 그만큼 부가적 에너지가 따른다. 그리고 이러한 태도는 실제로는 위선이라 불림직도 하다.


왜, 미워하면 좀 안되는가?

왜 나는 세상 모든 사람과 현상들을 포용해야만 하는가?



색깔에는 미추가 따로 없다. 흔히 어떤 색이 발그레하거나 파스텔톤으로 마음을 끌면 곱다, 예쁘다 부르기도 하지만, 그런 선호가 있다 하여 미추의 판단을 곁들일 수는 없다.

색은 말하자면, 그냥 있는 것이다.


감정도 일종의 색과 같다고 생각한다.

다양한 스펙트럼의 온갖 색상과 채도와 명도가 존재한다.

흰 빛만 추구하고 선택하려는 자는 어둠과 무채색의 심오한 깊이와 오묘함을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여기는 색의 세상이다. 미움의 색깔이란 것도 응당 존재할 것인데, 이 자연스런 현상을 '그래서는 안 될 무엇'으로 간주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삶은 더한 굴레로 변신한다.

마음에 안 들고, 거슬리고, 싸가지를 못 봐주겠고, 재수가 없고, 도대체 용서되지 않는 대상과 현상들은 널려있고, 늘 발생한다. 여기는 색의 세상인 데다, 온갖 것들은 충돌을 통하여 환기가 일어나고, 우리는 벌어지는 사건들을 통하여서만 삶의 학습이 가능해지므로.

똥을 악착같이 피하여 선한 것, 좋은 것, 아름다운 것만 골라 취하려는 것이 더 이기적이고 인위적이다. 나쁘다면 더 나쁘다.


내 안의 미움을 없애야 할 무엇으로 간주하여 그 감정을 품은 자신을 헐뜯게 되면 끝나지 않는 싸움으로 가는 지름길이요, 자신을 부정하는 일이기도 하다.


미워하는 게 뭐 어때서? 미워할 수도 있지. 적극적으로 위해를 가하지 않는다면, 감정으로서 그것을 품고 있는 것까지 미워할 일일까 싶다. 밖으로 꺼내어 위해를 가한다면 그 결과를 자신이 책임져야 하니까 골치가 아파지니까 권할 것은 못 된다.



사랑만을 추구하고 마음을 온통 비워야 할 것처럼 이야기하는 종교의 가르침들이 오히려 더 꼬여 있다. 인간들의 현재를 부인하고 있다. 그래 봤자 딱히 미움이 털어내지지 못할 것이 뻔하기도 하다. 불가능하고 와 닿지 않는 이야기들이야말로 사람들 마음의 자연을 옭아맨다. 아마도 종교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해서 얻는 자신들의 이득이 있을 테니까 그럴 거다. 인간 존재 안의 어떤 것을 죄악시해야만 그것을 필연적 통제의 빌미로 삼을 수 있으니까.



사랑도 미움도 여타 다른 감정도 절대시 하지 않는다면 한 개체 안에 품고 굴리는 것이 자연이다. 이걸 부정하면서부터 진정한 갈등이 싹튼다.

나는 누군가들이 진실로 밉다. 그리고 이 사실과, 미움을 가진 나 자신을 부끄러워하지 않을 것이다.


모든 감정은 타당하다. 그림자와 그늘이라곤 없는 빛뿐의 세상에선 살고 싶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