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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래연 Nov 05. 2020

리우의 예수상 아래서

                                                                                                                                                                                                                                                                               

                                                                      


           




방금 예수상에 다녀왔다. 예수 상도 상이지만 여기서 내려다보는 사방 경관이 근사했다. 


이젠 여행이 끝나가니 사진 올리는 일에 느슨해지기로. 여기는 먼저 숙소보다 인터넷 속도도 낫고 조명도 충분하지만, 다른 챙길 일이 많다.


사실 여행 떠나기 전엔, 포스팅은 무슨, 완벽한 휴식과 순간 몰입을 해야지 했지만, 저장과 기록을 버리기엔 아까운 순간들이 속출하면서 막연했던 다짐은 무의미해졌다. 시간이 지나 올린다는 건, 고삐 풀린 말의 시간을 달려가는 지금 21세기에는 나로서는 감흥이 감해지는, 일종의 그냥 정리벽적 의무가 되어버리기에, 가급적 조금이라도 그 즉시의 일들을 기록하려 하게 되었다.




아까 예수상 올라가는 트램 대기줄에선 세 명의 남자들이 자기들 자리 맡아 지켜달라고 부탁한 뒤 매점에서 맥주를 사 마시며 줄 밖 공간에서 놀고 있었다. 우리 일행은 기분 나빠했다. 외국인들 중에도 어디 가나 진상은 꼭 있네 이러면서. 그리고 곧 카니발 머리띠를 한 3명의 한국 여자들이 도착했다. 친구인양 자기들끼리 발랄했다. 


곧 탑승이 이뤄지면서, 이 여자들 3명이 뒤에 있는 누군가들의 농담에 웃으며 몸을 비틀고 꼬는 느낌으로 어쩐지 과하게 잘 받아주고 있다 싶었는데, 뒤의 사람들은 하필 아까 우리가 싫어한 그들이었다. 분명히 일행은 아니었다.


순간 이런저런 코드가 내부에서 확 엉키며 기분이 나빠졌다. 한국인 외국인 여자 남자, 재들 뭐니 하는 창피함과 비웃음. 


이런 내 반응은 개별적 자아가 일으킨다고만 볼 수 없는 것이었다. 


그다음 순간 자문이 일었다. 지하철역에서 노출 많은 옷 입었다고 젊은 여자를 욕하며 찰싹 때리는 할머니라던가, 노출 많은 옷이 성범죄에 빌미를 준다는 이상한 연결을 고리 짓는 이들과 나의 순간적 내면 반응은 분모를 공유하는구나, 내 것이 아닌 것을 통제하고 싶어 하는, 임의적 질서에 대한 완강한 불안 같은. 꼬이고 비뚤어진 일이다. 그렇다는 자각조차 일어나지 않으면서 이런 생각에 구실과 이유를 갖다 붙여가며 심지어 논쟁의 장으로까지 가져간다면 얼마나 소모적일까.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내게 뭔지 모르게 거슬리든 말든 저들을 한국인 여자로 묶으면서부터 다 무너진다. 이런 유의 비난은 어디에라도 날려 꽂고 싶은 증오의 투사일 뿐. 그들은 각자 생의 어느 순간을 지나쳐 가는 객 들일뿐이다. 한국인도 여자도 동족이란 의식도 다 사족이다. 판단들을 십자가에 매달고 싶다. 판단의 바깥 단에는 레이스도 아닌 넝마가 너덜거린다. 판단 행위가 예쁘기란 여간 쉽지가. 


셔터를 휴대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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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썼었지만, 지금 와 생각하면, 저런 감정을 부인하는 게 더 억지스럽다.

우리에게 부당한 행동을 한 외국인들과 과하다 싶게 친한 모습을 보이는 여자들이 싫어진 게 지금은 자연스럽게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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