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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하루는 건널목 건너간 이야기

by 래연






일기 말고 월 단위로 月記를 적는다면, 나의 월기는 순 병원 다닌 이야기가 될 거 같아.

같은 병원 몇 번만 오가면 한 달이 가곤 한다. 어떤 지하철역의 어떤 건물의 간판과 입구, 엘리베이터 안의 느낌, 대기실 풍경, 간호사들의 친절한 몸짓 등, 이 모든 것들이 상세하지 않은 윤곽선으로 추상화된 채 나는 그곳들을 방문했다가 빠져나오곤 한다. 귀찮지만 해야 하는 어떤 일을 서둘러 마친다는 정도의 기분으로. 지하철역에서부터 셈을 하지, 저쪽 출구에 에스컬레이터가 있어서 덜 걸을 수 있다고, 어느 신호등에서 대기하는 게 시간이 덜 걸릴 거라고. 이 병원까지의 이동거리는 비교적 짧아서 만족스러워,라고 매번 한 번씩 중얼거렸다. 간판의 색깔도 글씨체도, 뇌리 속에 세부는 생략된다. 하얀 바탕에 눈에 잘 띄는 느낌이었다 정도로만 저장된다. 이런 사실조차 쓰면서야 확인되지, 그랬다는 것조차 생략된다. 이런 체험들의 끝에 떠오르곤 하는 것은 항상, '어릴 때는 안 그랬었지, 안 그랬었는데.' 어릴 적, 그 어떤 날들엔, 집중해야 한다고 요구받던, 외부 세계에서는 골자라고 취급받는 그러한 사실만을 빼놓은 나머지 몽땅의 세계에 한꺼번에 꽂혀들거나 했었지.



핵심과 요점이라 일컬어지는 것들을 잡아 꿰는데 익숙해지면서, 살아가는 일이 점점 닳고 재미없게 되었어.

그러던 어느 날, 신호등이라도 건너다 어떤 한 풍경이, 그것도 아주 빨리 스쳐 지나가는 풍경이 갑자기 커다랗고 느리게 확대될 때가 있어. 흩어졌던 마음이 잠시 모이고, 짧은 영화라도 보고 난 것처럼. 바로 아까 그랬지. 건널목도 없이 냅다 한달음에 찻길을 뛰어, 혜성처럼 긴 여운의 꼬리를 남기며 건널목 너머 주차된 차 밑으로 기어들어간, 토끼처럼 짧은 꼬리의 고양이.

움직이는 것들은 마음을 끌지. 동식물도 광물도 아닌 나의 마음은 그리 시원히 이동치 못하고 건널목 이쪽에서 저쪽으로 저쪽에서 이쪽으로, 하루에도 여러 번 신호등의 눈치를 보며 오고 갈 뿐이야.

귀찮지만 해야 하는 어떤 일을 서둘러 마친다는 정도의 기분으로 생을, 빠르게 건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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