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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의 입지는 마치, 정상 취급받는 장애인 같다

by 래연





또 무대 가운데 설치된 여러 개의 패널은, 펼쳐지면 초록색 풀밭으로 변하여 바람에 펄럭이다가, 다시 사각으로 조립되면 카미유의 아틀리에로 기능하기도 했다. 이 아틀리에에서 카미유가(실제로는 카미유 역할의 인형이) 조각상을 빚는 장면에선, 여배우가 자신의 등을 드러내어 조각상 오브제 역할을 했다. 인형이 인간의 역할을, 살아 있는 사람의 몸이 조형물 역할을 하는 이 뒤바뀐 광경이 묘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여배우가 드러낸 등의 잔 근육은 마치 살아 있는 조각처럼 보이기도 했다.


(......)













극의 음향으로는, 비통한 허밍과 드라마틱한 멜로디의 노래 그리고 첼로의 선율이 가로질러 갔다. 이번 해에는 첼로 라이브가 트렌드인가 싶다. 어제 벨기에 극에서도 그러했다. 첼로의 음은 마리오네트 극과 잘 어우러지며 고스란히 심혼을 건드린다.





















조금만 시간을 내어주시겠어요?”

그녀가 이 말을 걸어오기 전까지 나는, 요양원에서 남은 평생을 보내야 했던 카미유 클로델의 일대기로부터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당대에 드문 천재성으로 역사에 각인된 하나의 샘플 같은 여성의 삶을 접할 때마다, 그 시대에 비해 별 나아진 것이 없어 보이는 지금 사회 속 여성의 삶을 돌아보게 된다. 근대 이후 과거 시대의 치렁치렁 기다랬던 스커트 길이가 짧아지고, 참정권이 생기고 남성과 동등한 교육을 받으며 다양한 직업 분야에 진출하게 되었으며 여성의 자기표현이 확대되었다고는 하지만, 이러한 진전에도 불구하고 여성의 지위는 그 바탕부터 여전히 답답하다.

이런 상념은 나의 유년기 체험의 조각들과 맞물려 진행된다. 카미유 끌로델은 어쨌거나 사랑을 했다고 치고, 21세기의 나는 지금에 이르러 성장기의 힘겨운 기억들을 조명한다. 성적으로 착취되기 쉬운 상황에 노출된 채 살아가는 여성의 지위를 처음으로 각인하게 되었던, 어린 날의 험난한 파편들을.


12살 때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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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람구두를 신은 피노키오> 중에서










어제 산책길을 걸으면서도 생각했다.

호시탐탐 노리고 억누르는 문화권 속에서, 여자로 살아간다는 불안감을.

무슨 일이 있고 없었건 간에, 기본 불안하고 불편한 것이다. 늘 자신을 통제하고 조신한 자세로 살아야 한다는, 이게 하도 내재적이라 새삼스럽지도 않을 만큼.

남자들을 잠재적 추행범 취급하는 거 아닌데, 이미 사회는 그래야 한다고 대놓고 암암리에 가르치는 것 같고.

여자의 입지는 마치, 정상 취급받는 장애인 같다.



여자라는 공간은, 종족 유지를 위해 피치 못하게 영입된, 이 지구 안에 세 들어 사는 이상한 임시 우주 같다. 여태 여러 문화권에서 흘러온 양상을 보면.

갖은 방식으로 실컷 이런 입지가 내면화된 다음, '다 그런 거 아니다, 너만 당당하면 된다.'따위 말들은 또 얼마나 무성의하고 폭력적인가!




내가 여자란 게 의식될 때마다, 집 밖을 나와 어디로도 가기 싫다는, 깊이 폐쇄된 마음의 공간으로 자꾸만 돌아오게 된다. 사춘기 즈음엔 더 심했다. 버스 한 번 타는 것도 무지 긴장되고, 그냥 걸어 다니는 것도 피곤했다.

내가 심하게 느끼는 것일까? 다른 여성들은 어떨까?


이런 말들을 하고 있으면 내가 극 예민하고 경계심에 넘쳐 날이 잔뜩 서 있는 사람이 아닐까 싶을 수도 있지만, 현실의 나는 오히려 반대다. 도사리는 게 숨이 막히기 때문에 도사림을 푸는 편이다. 그러나 마음속 깊은 계곡에선 불안감이 머리를 거꾸로 내리 박으며 추락한다. 혹여나 경계심을 드러내어 상대방을 불편하게 하지 않으려, 겉으로는 예민하게 굴지 않으려 티 나지 않게 조심까지 하기 때문에 배로 힘들다.



같은 인간인데, 왜 여자라는 인류는 이렇듯 숨이 불편한가!

나는 페미니즘에 관심 가져 본 일도 없고, 남성을 적대시하지도 않지만, 그냥 숨은 쉬고 살고 싶다.

이렇게 한 번은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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