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당연필만 한 젊음을 보내며, 나는 아이들이 놀다 사라진 골목과 뒤뜰에 떨어진 누더기 헝겊을 줍는다. 언젠가 내 것이었던 ‘경이’라는 그 천은 이제 너덜너덜 닳아있다. 이것을 언제쯤 잃었던 걸까. 매일같이 햇빛 속으로 뛰어나가 노는 꼬마처럼 지루함을 모르는 나날들도 있었건만.
삶의 시간은 점점 줄어가는데, 시간은 모래사장에서 손가락 사이로 계속 빠져나가는 모래알 같기만 하다. 하루를 이루는 24개국의 병정 인형들이 다채로운 제복을 입고서 눈앞을 휙휙 행진하여 지나간다. 그중 누구에게 말을 걸거나 나란히 같이 걸어볼 사이도 없다. 이 일이 매일같이 반복되고야 만다. 아마도 내 뇌 속의, 시간의 흐름을 감지하는 센서에 이상이 생겼을지도 모른다. 혹은 어린 시절 매 순간 영원과 연결되어 있던 수많은 교량들이 차츰차츰 차례로 폭파되어버렸을지도. 그리하여 난파된 자아는 자그마한 구명조끼를 걸치고 구명뗏목에 겨우 몸을 싣고 위태로이 떠다닌다. 살기 위해 안타까이 낚시를 하거나 혹시라도 같은 바다에 표류하고 있을지 모를 동료를 애처로이 찾아 헤매는 일, 이것이 어른의 삶이지 싶다. 어쩌다 그 몇몇이라도 만난다면 낡은 뗏목들이라도 서로 묶어 버텨보려고 서성이는.
사실 이 긴 여행을 떠나게 된 건 갑자기는 아니었다. 짚어 올라가면 고구마 줄기처럼 딸려 올라오는 유래가 있다. 수년 전 점성 카페에서 내 인생 전체의 차트를 조감한 적이 있는데, 점성가는 내 지난날과 앞으로 올 날을 명쾌하게 10진법으로 짚어주었다. 열악한 유년기, 인간관계 풍성한 20대, 많은 인간관계에 염증을 느껴 스스로 세상을 등지며 감정 문제에 질질 끌려다니는 30대를 지나면, 40대 이후엔 세상과 인간에 대해 다른 관점을 갖게 된다고 했다. 내 식으로 연령대별 삶을 종합하면, 20대는 혼란을 질러가느라 정신없는 시기, 30대는 그 혼란이 빚은 결과를 분석하며 낱낱이 아픔을 곱씹는 시간, 그리고 40대는 과거를 일단 한 번 보내고서 비로소 다시 살기 시작하는 시기이다. 이 이야기를 들을 때는 아직 30대여서 바로 감정의 문제가 화두인 시기였다.
무릇 모든 사랑의 중심에는 자기애가 있는데 이것을 시급히 복구해야 할 만큼 내 마음은 충분히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20대에는 오로지 정열만으로도 연애가 가능하지만 언제까지고 그러한 것은 아니다. 기본적으로 자기와의 밀애라는 기초공사가 되어 있지 않은 한, 늘 새로운 열 번의 두근거림조차 늘 이상한 허무감으로 귀착되곤 했다. 나를 먼저 끌어안아야만 진정한 연애가 가능하다는 깨달음이 왔다. 이윽고 번번이 실패한 로맨스들의 부산물인 자기애적自己愛的 상처에 붕대가 필요해졌다. 이 필요가 부른 계기는 마음을 치유하는 학문과 기술에 대한 공부들이었다. 심리학, 예술심리치료, 기氣치료, 삶의 의미에 대해 우주적 전망을 주는 서적들의 탐닉, 정신과 상담과 최면치료, 신과 대화한다는 사람들과의 만남, 지문 읽기와 부적 만들기, 온갖 테라피의 워크샵 등을 전전하며 붕대를 연신 갈아 대었다.
심리치료 상담 프로젝트는 생각만큼 환상적이지 않았다. 영화 «굿 윌 헌팅»에 나오는 것처럼 로빈 윌리암스 같은 치료사로부터 “네 잘못이 아냐.”소리를 반복하여 듣고서 모든 저항이 무너져 펑펑 울고 나서 새로 태어남을 맛보는 고마운 과정은 일어나주지 않았다. 펑펑 울고 나면 개운하기는커녕 기분이 찜찜하고 억울해졌다. 내 안에 층층이 가라앉은 독성 정서의 침전물이 휘저어져 부유했다 다시금 가라앉을 뿐이었다. 그리고 상담 이력은 그간 꽤 쌓여서 나를 정화시키기엔 이 방법은 이미 물린 상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