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그림자들이
일제히 묻는다
너는 나에게 우리들에게
안전한 실체인가
늘 그렇듯
부드러운 응달은
그 무엇도 삼키지 않고
다만 무한대의
가지런한 깊이로
소리 없이 핥는다
그 어느 때라도
살아 있는 어떤 것의
그림자를 지날 때는
무수한 기포의
소리를 밟지 않도록
조심할 것
첫날 무슨 생각들이 지나갔는지...... 모른다. 단지 앞으로 처리해야 할 일들, 맞이해야 할 상황들에 대해 긴장이 계속되고 있었다. 오후엔 장을 보았다. 거처에 안착함을 기뻐할 겨를도 없이 부랴부랴 생필품 쇼핑을 해야 했다. 골목에서 웬 아저씨에게 가장 가까운 마트를 물었더니 그는 대뜸 그곳까지 태워 주었다. 역시 여기는 사람에 대한 경계 없는 호의가 느껴지는 프랑스인 것이다.
첫날 오후엔 마트표 만두파스타를 데우고 버섯을 볶아 막 산 그릇들에 담아 먹었다.
필수품 쇼핑은 이후 한동안 계속 추가되었는데 이 쇼핑에 대한 내 원칙은 ‘적당히 쓸모 있되 너무 좋지 않을 것’이었다. 떠날 때는 태반을 버리고 가야 할 터인즉 잔정 많은 나의 마음을 붙들만한 물건이면 곤란했다. 헤어질 때 덜 아까울 물건을 고르는 일도 쉽지만은 않았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도 그 때 커피잔이자 동시에 국그릇으로 쓰던 넓적한 잔이 그리운 것을!
싸지만 단단하고 빛깔 예뻐 맘에 드는 그릇이었다. 여기에 밥도 국도 스프도 커피도 다 담아먹곤 했다.
그때 사용하던 그리운 그릇들
그날 당장 고픈 배를 채우기 위해 데워먹는 슈크르트choucroute를 샀다. 이런 레토르트는 처음엔 혹하지만 아무래도 맛이 떨어진다. 카술레cassoulet도 진짜 카술레가 아니고 라타투이ratatouille도 진짜 라타투이가 아니다. 무늬는 같지만 풍미가 떨어지는 이런 식품들은 원래의 음식들의 명성에 누가 되기조차 했다.
온통 새로운 환경과의 만남으로 인해 격하게 피로했다. 저녁에는, 당장 그다음 날 시험을 앞두고 일찍 잠들었을 만도 한데 낯선 도시에 갓 도착한 호기심은 우릴 고이 휴식하게 할 리 없었다. 이게 다 모험심 넘치는 인간 네비게이터 케이 때문이었다. 내 동행인인 그는 내가 늘어져 자도록 두지 않고, 첫날인데 나가서 뭐라도 먹자고 꼬드겼다. 나는 케이와 함께 시내까지의 지름길 탐색에 나섰다. 이런저런 거리들을 헤쳐 앙리 4세가 태어난 성城을 발견했고 근처 골목의 레스토랑에서 요리와 이 지역 포도주를 즐겼다. 이 ‘엉트르 포트’라는 식당은 성 근처 골목에 위치해, 테라스에 앉으면 고풍스런 골목의 느낌이 물씬 전해져 온다.
첫 저녁 식사를 한 곳, 엉트르 포트
앞으로 깃들어 살 도시의 첫날 저녁, 성 근처에서 식사를 하는 느낌은 설레고 행복했다. 지나왔던 길들의 고단함은 모두 지워지고 앞으로의 길들만이 골목의 가로등 아래 아늑하고 희미한 축복처럼 펼쳐졌다. 언젠가 다시 그곳 레스토랑 길 가 자리에 앉아 잔을 기울이고프다.
그 당시 매일의 기록들을 그때그때 남기고 싶었으나 그러지 못했다. 나는 그곳에 너무 살아 있는 나머지 심지어 ‘기록’이 끼어들 틈조차 없었다.
포에서의 첫 저녁 식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