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2주가량 아이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돌아가며 결석을 했다. 터키에서 늦게 도착했던 성진 씨는 영국 아이들이 매일 파티하고 노느라 수업에 잘 안 들어온다고 했다. 그러나 우리 반의 영국 아이들이 맹렬히 노는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고 실제 이 고른 결석의 이유는 하나같이 감기였다. 최초의 보균자는 니콜라였다. 첫날 자기소개 때부터 이미 그는 심한 감기 상태였는데 닉(니콜라의 애칭)이 나으면서 바이러스는 곧 다른 아이들에게로 차례로 옮겨 다닌 것이었다.
이상하게도 선생님들은 결석, 지각, 조퇴에 의외로 관대했는데 여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얼마 전부터 창궐하기 시작한 신종플루 때문이었다. 선생님 중 하나인 마리나 지르코프(이름조차 어딘가 감기약 같기도 한)는 이렇게 설명했다. 신종플루는 여기서는 그리프 아grippe A라 불리는데 이곳의 선생님들은 학기 시작 전부터, 전 세계로부터 도착할 학생들이 건네줄지도 모를 잠재적 바이러스에 공포를 품고 있었다고 한다. 이 까닭에 선생님들은 누군가 아프다면 그게 가벼운 감기건 기관지염이건 간에 그저 속히 격리하여 푹 쉬게 해서 완치되기를 기다렸다.
이 와중에 어느 날 아침 등교해보니 유일한 단짝 파리다가 다른 반으로 이미 떠나 있었다. 예고조차 없었기에 새삼 그녀의 공백이 크게 느껴졌다. 마리 크리스틴은 나를 위로했다. “수형을 제외하고 모두가 앙글로폰(영어권 사람)이네, 어쩌나, 그래도 여기 나도 있고 이시도라도 있쟎아?”
“괜찮아요.” 씩씩하게 대꾸하며 옆에 앉은 이시도라를 넌지시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시도라는 영어보다도 더 알아듣기 힘들게 몹시 빠르게 굴러가는, 스페인어 억양의 프랑스어를 구사하고 있는지라 역시 내 편에서 그녀를 피해 다니던 참이었다. 나는 이제 식당에 같이 갈 친구 하나 없는 셈이었다. 슈네이드로 말하면 점심때마다 자기의 영국인 단짝을 찾아갔고 더욱이 채식주의자이기까지 해서 식당보다는 교내 아무 데나 걸터앉아 스스로 만들어 온 샌드위치를 뜯곤 했다.
학교 식당에는, 나탈리가 추천한 레스토랑 ‘캅 쉬드’에 즐겨 갔다. 학생 식당은 우리 학생들에게는 싼값에 양질의 식사를 할 수 있는 곳이다. 그날의 요리에 야채, 과일까지 먹으면 2.9유로, 디저트 하나쯤 더 먹어봤자 고작 3.3유로에 불과했다. 고기는 소, 돼지, 양, 칠면조, 닭, 각종 생선 등이 돌아가며 조리되어 나왔다. 버터에 볶은 감자, 당근, 껍질콩 등이 곁들여졌다. 이 식사로 말할 것 같으면, 내 인생에서 이 기간에만 누릴 수 있는 프랑스 학식 체험이었으므로 틈틈이 식사 쟁반을 사진으로 남겨두곤 했다.
식당이라는 곳, 모두가 어우러져 먹는 장엄한 의식을 치르는 곳에 나도 한 참가자로서 앉아 있다는 사실은 매번 설레는 일이었다. 널따란 학생 식당 전체에 울려 퍼지던 학생들의 웅성거림, 식당 밖까지 이어진 긴 줄에서 간간이 들리던 대화들, 식당 창가 자리에 앉으면 창밖으로 보이던, 계절감이 뚜렷하게 그라데이션을 이루던 이파리 많은 나무들, 이 모든 것이 지금은 별 이유 없이 그립다. 아직도 그 공간에 있는 것처럼.
학생증은 일정 기간이 지나자 자동 발급되었다. 이 학생증 카드에는 돈을 충전하여 식당에서 결제하는 데 쓸 수도 있고 교내 커피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아 먹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새로운 방식을 시도해보는 데 저항감을 느껴 한동안 그냥 동전을 넣고 40상팀짜리 커피를 마셨다. 암튼 이 학생증은 지금껏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 굉장한 세월이 흐른 후에 한 번 가져 본 오랜만의 학생증. 이 학생증과 재학증명서 등을 가지고서 학교 앞 크레디 아그리콜crédit agricole에 가 계좌 만들기를 시도했다. 마르고 깐깐하게 생긴, 오드리라는 직원과의 대화는 수월하지 않았다. 더 많은 서류가 필요했는지, 재정보증인이 어쩌구저쩌구 해서 또 다른 랑데부를 잡고 헤어졌다. 바로 그다음 주 잘 갖춰진 서류뭉치를 보더니 오드리는 “엉페카블르!Impéccable!"(나무랄 데 없군요!)하고 외치더니 갑자기 친절해졌다.
프랑스 은행은 우리나라 은행과 너무나 다르다. 은행 직원 복장 같은 것은 있지도 않다. 오드리는 쾌적해 보이는 사무실을 혼자 통째로 쓴다. 그녀는 언제나 무채색의 미니멀한 복장에 심플하고 세련된 악세사리들을 두르고 있다. 오드리는 고객이 오면 반갑게 악수를 청하고 사무실로 인도하면서 “곧 올께요.”라고 하며 하던 일을 마저 마치러 간다. 서두르는 법이 없다. 항상 적은 대기자들, 그래도 어떻게 은행이 굴러가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통장 없이 카드로만 거래하며, 이자는 주지 않는 대신 다달이 은행이용료에 계좌의 안전을 보장하는 보험료며, 내가 동의한 기억이라곤 없는 잡지 발송료 등이 계좌로부터 적지 아니 빠져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