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놀라 벌어진 우리의 네 개의 눈에 세상이 유일한 검은 숲으로 환원되고- 두 명의 무구한 어린아이에게 하나의 해변이 되어버리고- 우리의 투명한 공감에 하나의 음악적인 집이 되어버릴 때- 나는 그대를 찾아낼 것이다. 주1)
나는 언제나 열일곱 살이다.
랭보의 고향에서 엽서 한 장을 샀었다. 그림 속엔 시인 랭보가 벤치에 걸터앉아 있고, 하단에는 이런 글귀가 적혀 있다. 나는 언제나 열일곱 살이다. 실제로 그가 언제 태어나 죽었건 그는 열일곱 살로서 살다가 죽었고, 늘 열일곱 살 같은 모습으로 우리에게 기억된다. 누구에게나 매한가지인 인간의 수명을 살다 가고서도, 왜 누군가는 다른 모든 이와는 달리 시간을 초월해 언제고 영원히 젊은 것인가? 일찌감치 반항을 시작하여 생애 내내 그것을 그치지 않았기 때문일까?
이런 의문을 담고서 다시 그곳으로 향하였다.
네 번째다, 샤를르빌 메지에르.
랭보의 고향이라 오고 싶던 곳이었다. 처음 거기 갔을 때는 오로지 랭보를 만나는 일이 전부였다. 오래 간직해온 꿈 한 개를 실현하는 일처럼, 뫼즈 강변의 물결을 딛고 선 랭보 박물관에 들렀다. 거기서 랭보의 자필 원고들 그리고 그가 여행 중에 쓰던 트렁크와 수저를 보았다.
또한 한 세기 전의 그가 그러했겠듯, 나도 그를 따라서인 양 뫼즈 강변을 죽 따라 걸었고, 그가 태어났던 집에도 발걸음을 했다. 그리고 조금 더 걸어서는, 랭보가 누이와 나란히 묻혀 있는 마을 묘지에도 갔다. 묘지 입구에는 랭보에게 부치는 우편함이 있었다. 몇 년 후 다시 또 보러 오겠다고 랭보에게 편지를 써서 종이배 모양으로 접어서, 실제로는 누가 수신할지 모르는 통에 집어넣었다. 그 날, 유난히 파랗게 느껴졌던 오월의 밤, ‘뫼즈’라는 이름의 호텔에 묵었다.
그리고는 이후 두 번을 더 왔다. 그러자, 그리 크지 않은 이 도시의 자주 다니는 길과 슈퍼마켓, 숙소와 모든 풍경들은 곧 친숙해졌다. 두 번 세 번 오면서 거기는 곧 랭보의 고향이자 나의 고향이 되기도 했다. 고향의 2차적 의미, 즉 깃들어 마음 붙이고 그 준 마음을 다시 거두지 않은 모든 장소가 그러하듯이.
지금으로 치면 중2병 걸린, 더 나아가 그 병을 거침없이 극단까지 밀고 간 자유와 반항의 화신 랭보, 프랑스 청소년의 대다수는 자신과 랭보를 동일시한다고 읽은 적이 있다. 프랑스 문학뿐 아니라 전 세계 문학의 역사에서 가히 혜성과도 같은 이 시인은, 청소년기의 에너지를 극한까지 끌어올릴 수 있다면 중2병조차 성스러워질 수 있다는 표본이 되었다.
랭보, 영원한 내 아이돌.
짚수세미 같은 머리에 손은 주머니에 찔러 넣고 긴 다리로 휘청휘청 걸으며 이 작은 도시를 배회했을 그. 온 우주와 교감할 듯 자뻑에 차서 당대 문학을 꿰뚫어 평(評)할 만큼 충분히 건방진 정신을 지녔기에, 이 작은 도시가 그에게는 더욱 숨 막히게 답답했을 터이다. 이 도시 전체가 통째로 그의 감옥이나 다름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채 한 세기도 지나기 전, 이곳 샤를르빌은 축제의 장으로 변모한다. 랭보가 미지(未知)를 투시하려는 열망에 목 졸려하던 끝에 그토록 벗어나고자 했던 이곳에는, 바로 그 미지의 세계에서 초대된 듯한 온갖 몽환의 무리들이 떼를 지어 도달한다. 한 해 건너 한 해마다 매 9월이면 말이다.
그들은, 마치 망자 랭보가 불러들인 혼령들처럼 일제히 솟아나 무리지어 노래하고 춤추며 온 마을을 행진하고, 보이지 않은 세계에서 온 메신저나 특파원들처럼 이곳 모든 극장의 무대로 관객들을 초대한다. 한 세기 전 미지의 세계로 떠난 랭보가 자기 무덤가로 불러들인 듯한 이 꼬마 도깨비불들의 행렬은 동심의 주변을 돌면서 잠시나마 영원을 엿보게 해주며, 기왕이면 살아가는 동안 축제의 시간을 만끽하라고 합창한다.
나는, 내 생애라는 앨범의 장과 장 사이를 벌리고 낡은 신발을 벗어 그 위에 누름돌처럼 지그시 얹어두고는, 맨 발로 자근자근, 이내 작고도 충만한 향연의 시간으로 걸어 들어간다.
바로 거기 진짜, 내가 있다.
문득 정신이 든다, 꿈을 깬 듯. 내 생애의 앨범에서 이전 장들의 나는, 아무도 줄을 붙들어주지 않아 그만 한 구석에 내팽겨쳐지고만 작은 광대인형일 뿐이다. 그런데 여기 인형의 나라에선, 인형이었던 내가 이제 진짜 사람이 되어 영혼들을 만난다. 여우도 고양이도 귀뚜라미와 초록 머리 요정도. 어쩌면 나무인형 피노키오의 진짜 아버지 제페트도.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와의 사이에 임시 가교가 세워진다. 유랑극단들이 잠시 닻을 내린 막사들에는 우리가 떨어뜨리고 잃어버린 꿈들이 즐비하다. 여기서 영원을 엿보다 다시금 차가운 현실 세상으로 돌아간다 해도 슬퍼하지 않아도 된다. 우린 늙음도 죽음도 언젠간 멈추고 모두 고향에 가게 될 테니까, 다시 어린이가 되어 손을 맞잡게 될 것이므로,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 시간은 우리에게서 결국은 아무것도 빼앗을 수 없다.
주1) 원문: Quand le monde sera réduit en un seul bois noir pour nos quatre yeux étonnés, - en une plage pour deux enfants fidèles, - en une maison musicale pour notre claire sympathie, - je vous trouverai.
Arthur Rimbaud, <Phrases>
시인 아르튀르 랭보의 무덤, 샤를르빌 메지에르, 프랑스.
샤를르빌 랭보 서점의 랭보 코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