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턴가 나도 산에서 한 번 뛰어 보고 싶었다.
보통 풀코스 마라톤 완주를 하고 나면, 철인 3종, 울트라 마라톤 혹은 트레일 러닝 같은 곳으로 눈을 돌리게 된다던데, 진짜 그런 모양이다. 하나의 도전을 완성하고 나니, 나도 또 다른 도전을 하고 싶은 욕망이 꿈틀거렸고, 그래서 쉬엄쉬엄 한강 3종 축졔(엄밀히 말하면 철인 3종은 아니지만)에도 참가해 봤고, 트레일 러닝도 언젠가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다.
주변에 트레일 러닝하는 사람도 없고, 좀처럼 산에 갈 일도 시간도 없었는데, 모처럼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다. 우리 집 막내 녀석이 한 달에 한 번 동네 뒷산에서 생태 체험 수업을 하는데, 여름이라 너무 더워서 7월은 휴강을 했고 8월엔 수업 대신 남한 산성 계곡으로 물놀이를 가게 된 것이다. 시간은 10시 20분부터 1시 20분 딱 세 시간. 그렇다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딱 세 시간이다.
트레일 러닝을 하게 될 날이 언젠가는 올 줄 알고, 트레일 러닝화는 반년 전에 세일할 때 미리 사두었다. 이걸 신고 등산 아닌 등산 한 번했고, 방수 기능이 있어 주로 비 오는 날 러닝화 용도로 신고 있었다. 그 외에는 아무런 장비가 없었다. 그 흔한 러닝조끼도 없어서, 급하게 당근마켓에서 하나 살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그래, 내가 트레일 러닝 몇 번이나 한다고... 게다가 이것저것 브랜드니, 필요한 기능이 무엇인지 알아보지도 않았는데 굳이 아무거나 대충 사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 신발만 있으면 최소한의 준비는 된 거지 뭐...
그런데, 트레일 러닝은 어떻게 하는거지?? 그냥 산에 가서 뛰면 되는건가??
현생 사느라 바빠서 이것저것 정보 찾아볼 시간도 없고, 솔직히 좀 귀찮았다. 그래서, 인스타그램에서 친하게 지내는 인스타 친구분에게 DM을 보냈다. 그분으로 말할 것 같으면, 러닝을 나보다 훨씬 열심히 하시는 분이고, 최근에 트레일 러닝하는 사진들이 많이 포스팅이 된 터였다. 게다가, 남한산성 근처에 사셔서, 남한산성에서 주로 뛰시는 분이었다.
내가 전후 사정을 이야기하니, 친절하게 여러 가지 조언들을 해주셨다.
- 오르막은 걷고, 내리막, 평지는 뛰어라
- 물이랑 간식, 손수건 등을 챙겨라
- 남한산성 남문-동문-북문-서문으로 한 바퀴 돌아라
시간이 없으면 북문에서 다시 남문으로 복귀해도 된다
러닝조끼가 없어서 물이랑 간식은 생략할까 하다가, 집에 있던 힙쌕이 생각이 났다. 어깨에 크로스로 메고 뛰면 될 것 같았다. 파워에이드 페트병을 넣으면 좋을 텐데, 사이즈가 안될 것 같았다. 편의점에서 파워에이드를 캔으로 하나 사고, 삼각 김밥 하나, 자유시간 하나를 챙겨 넣었다. 어깨에 메어 보니, 꽤나 무겁다.
나의 첫 트레일 러닝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더위가 한창이던 8월 셋째 주 토요일 오전 10시 20분에 말이다.
아이를 선생님께 보내고, 나의 트레일 러닝이 시작되었다. 아이 집합 장소가 남한산성 남문이 아니라 그 훨씬 아래쪽이었는데 일단 남문까지 올라가야 했다. 이 구간에는 평지는 거의 없고 1km 오르막 구간이다. 아, 이걸 걸어야 되는 건지 뛰어야 되는 건지.... 걸어도 상관없었을 텐데, 첫 트레일 러닝이라 설레기도 하고 의욕이 넘쳐 조깅페이스로 뛰다가 걷다가 하면서 올라갔다. (사실 그렇게 거리가 길 줄 몰랐다.)
남문에 도착해서 동문까지는 거의 평지... 아 좋구나... 이게 트레일 러닝인 건가..
좋았던 기분도 잠시, 동문에서 북문까지는 거의 지옥훈련이었다. 오르막도 가파르고 계단도 있고 평지는 거의 없었다. 아.... 진짜 그냥 중간에 다시 내려가고 싶을 정도였다. 트레일 러닝이 이게 맞나, 인스타 지인은 여기를 뛰어다니는 게 맞나, 내가 길을 잘못 든 건가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게다가 등산객은 있어도 나처럼 트레일 러닝하는 사람은 눈 씻고 찾아봐도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렇게 한참을 걷고 잠깐 뛰고 한참을 걷고 잠깐 뛰다 보니 어느덧 북문에 다다랐다. 시계를 보니, 서문까지 찍고 내려가기에는 시간이 좀 애매해 보였다. 그래서, 북문에서 좀 쉬면서 간식을 먹고 지름길로 바로 남문으로 내려왔다. 내리막길은 어찌나 편하던지 더 걷고 싶을 정도였는데, 너무 빨리 내려와 버렸다. 파워에이드 캔 하나로는 갈증이 가시지 않아 내려와서 편의점에서 파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하나 사서 또 벌컥벌컥 마셨다. 아, 운전만 아니었다면 바로 맥주를 집어 들고 원샷을 했을 텐데 참 아쉬웠다.
산에 처음 올라갈 때는 그렇게 힘들고, 생각보다 별로 재미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끝나고 내려올 때는 다음엔 더 길게 뛰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고, 다른 산에도 한 번 가서 뛰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올라갈 땐 힘들어도 중간중간 만나는 평지는 어찌나 반갑고, 내리막은 어찌나 더 반갑던지... 오르막을 올라가 보니 평지에서 뛰는 게 더욱 반갑게 느껴지기도 했고, 깃털처럼 가볍게 뛰어지는 것 같았다. 아, 이런 게 트레일 러닝의 매력인가? 게다가 나무가 가득한 산에서, 흙을 밟으면서 뛰는 것도 참 매력적이었다. 천변 우레탄 바닥이랑은 또 다른 느낌이다.
다만, 무리하게 뛰다가는 부상을 당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내리막 길에서 다리가 풀려서 넘어질 수도 있을 테고, 발목을 삐끗한다거나 미끄러져 넘어질 수도 있으니 조심해야 할 것이다. 솔직히 어느 구간에서는 나도 다리에 힘이 풀려 조심조심 내려왔다.
내가 이렇게 걷고 뛴 이게 트레일 러닝이 맞는 건가 잘 모르겠다.
아무튼, 색다른 경험이었다. 힘들게 산을 오르락내리락 한 덕분에, 다음 동네 데일리 러닝 때, 평지에서 뛰는 것이 훨씬 쉽게 느껴졌고 몸도 가볍게 느껴졌다. 역시 하드 트레이닝 한 번 하면, 그 강도 이하의 것은 참 하찮게 느껴지는 법이다.
등산하는 사람도 대단하고, 트레일 러닝하는 사람은 더 대단해 보인다. 그동안 평지에서만 뛰던 나 자신이 한없이 작아 보였다. 대단한 산을 뛴 것도 아니고 남한산성일뿐인데 말이다.
슬슬 러닝 조끼 좀 알아봐야겠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