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년 만의 11월 최대 폭설이라는 눈이 왔다.
달리기는 해야겠는데, 기온은 둘째치고 바닥이 미끄러워서 밖에 나가서 뛸 엄두가 나질 않았다.
아, 월누백해야하는데...
서울에 폭설이 내린 그날을 기준으로 나의 월 누적 마일리지는 80km 남짓이었다. 내가 일명 월누백(월누적마일리지 100km)을 꾸준히 한지는 1년반 즈음 되었다. 그전에는 월누백따위는 신경도 안 썼고, 한 달에 50km에서 80km 정도 뛰는 러너였다. 그러다가 어쩌다가 100km를 달성하고 나니 왠지 모를 뿌듯함과 성취감이 있었다. 단위수가 하나 더 생겼을 뿐인데, 그게 뭐라고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마치 처음 10km를 달성한 느낌과 흡사했으며, 경험해보진 못했지만 SUB3를 달성한 것과 비슷한 성취감이랄까?
그 후로 지금까지 딱 한번 빼고 꾸준히 달성해 왔다. 딱 한 번이 언제냐면, 무릎 부상을 당했을 때였다.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새 러닝화를 사고 신발에 적응 하느라 무릎 쪽에 약간 불편한 감이 있었던 것 같다. 그렇다고 러닝을 안 한 건 아니고, 무릎이 아프지 않을 정도로, 단거리만 뛰어서 그 달에는 80km 정도 뛰었던 기억이 있다.
벌써 11월 말인데, 폭설이 내린 그 시점에 나의 월 누적 마일리지가 80km였으니 좀 조바심이 났다. 아 월누백 채워야 하는데... 사실 웬만하면 요즘은 130km 정도는 채우는데 이번 달은 풀코스 마라톤 뛰고 월초에 좀 푹 쉬느라 마일리지 쌓기가 좀 버거워졌다.
눈이 와서 바닥도 미끄럽고 하니, 밖에서 뛸 엄두는 안 나고 아파트 지하 주차장에 가서 한 번 뛰었다. 사실 작년 겨울에 강추위에 아파트 단지에서 좀 뛰다가 중간에 너무 추워서 지하 주차장에서 조금 뛴 적은 있었지만, 온전히 지하주차장에서 뛴 경험은 한 번도 없었다.
아무튼, 월누백을 위해서 지하주차장에서 뛸 요량으로 나갔다. 일단 간 보는 느낌으로 조깅 페이스로 뛰어야겠다는 생각으로 나갔고, 레깅스차림의 좀 너무 러닝복장으로 나가면 사람들 마주치면 좀 부끄러우니까 신발만 러닝화를 신고 일반 추리닝을 입고 집을 나섰다.
내가 사는 아파트 단지는 나름 3000세대가 사는 대단지라서 지하주차장 공간이 꽤 넓은 편이고 지하 2층이 메인이고, 지하 3층은 차량 통행이 그다지 많지가 않다. 나도 이 아파트에 10년 넘게 살았지만 지하 3층에 주차한 적이 거의 없다.
오랜만에(?) 지하 3층에 가보니 역시나 좀 낯설고, 역시나 다니는 차는 별로 없다. 다니는 차는 별로 없지만 주차된 차들은 거의 만차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뛰었다. 지하주차장 3층에서... 공기가 좀 답답한 것 말고는 딱히 불편함은 없었고, 뛸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이거 지하주차장이랑 사랑에 빠질지도 모르겠는 걸?
그날, 3km를 뛰고 그다음 날은 6km를 뛰었다. 크게 한 바퀴를 돌면 대략 1.5km 안팎이고, 첫날은 그럭저럭 괜찮았는데 6km를 뛰려니 마치 트랙 러닝을 하는 것처럼 좀 지겹다는 생각이 슬금슬금 들기 시작했다. 아, 이거 사랑에 빠져야 되나 말아야 되나.
지하주차장에서 두 번 뛰어보니, 추위와 눈을 피해 지하주차장에서 무언가를 하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았다. 첫날엔 개산책러, 파워워킹러, 그냥 산책러 등을 만났고, 두 번째 러닝에서는 그때 그 개산책러와 또 다른 산책러, 그리고 인라인 스케이트 타는 아이들을 만났다. 지하 3층 주차장에는 기둥 때문에 생기는 dead space가 있어서, 아이들과 선생님(?)이 그곳에서 인라인 스케이트를 타고 있었다. 나 말고도 지하주차장에서 activity를 즐기는 사람들이 있다니, 뭔가 내적 친밀감도 들고, 나만 지하주차장에서 삽질하는 건 아니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지하주차장에서 러닝을 하니, 거리가 늘어날수록 좀 지겹다는 단점 말고 한 가지 단점이 더 있는데 그건 바로 GPS다. 나는 러닝 할 때 나이키 런클럽(NRC) 앱과 애플 헬스 앱을 사용하는데 두 개의 기록이 다르게 나왔다. 특히 지도상의 루트 트래킹이 제대로 되질 않았다. 예를 들면 첫날은 NRC는 3km, 애플헬스는 2.5km가 나왔다 그다음 날도 딱 두 배만큼의 차이가 났다. GPS가 튀어서 좀 짜증이 나기는 하지만, 나는 NRC를 기준으로 월누백을 계산하고 있고, 애플 헬스앱보다 거리가 더 길게 나오니, 딱히 나쁠 건 없다. 덜 뛰고 마일리지는 많이 쌓고... 나쁘지 않다. 게다가 실제 뛴 거리보다 길게 나오면 평균페이스도 당연히 더 빠르게 나온다. 오히려 좋아...
또 한 가지 이슈는 역시 복장이다. 일반 기모 추리닝바지를 입고 뛰었더니, 하체가 매우 덥고 불편하다. 레깅스 바지를 입으면 더 편할 텐데, 너무 러너 차림으로 나가면 좀 부끄러울 것 같아서 아직 용기를 못 내겠다. 나로 말하자면 I형 인간이니까...
역시 한 번이 어렵지 두 번째부터는 쉽긴 하다. 망설임의 정도가 첫 지하주차장 러닝보다는 두 번째가 훨씬 덜했다. 겨울에 매번은 아니지만, 이번처럼 야외 빙판길이 우려되거나, 비나 눈이 많이 내리는 날엔 지하주차장을 계속 이용하게 될 것 같다. 첫날은 공기도 답답하더니 두 번째 뛸 때는 적응이 됐는지 크게 답답하지도 않았다.
지하주차장에서 뛴다고 무슨 미친놈 같기는 하지만, 나름 안전하게 차량 통행을 봐가며 조깅페이스로 천천히 뛰고 있다. 경기도 시흥인가 어딘가에 겨울에 트랙을 비닐하우스 터널로 덮어 놓는 곳이 있다던데, 거기도 한 번 가보고 싶다.
작년 겨울에도 열심히 야외에서 뛰며 월누백을 달성했는데, 올해는 왜 이렇게 자신이 없는 건지 모르겠다. 지하주차장 러닝 2번으로 이번 달 마일리지는 89km가 되었다. 지금은 11월 30일 새벽 2시 37분이다. 대략 19시간 안에 11km를 뛰면 월누백 달성이다.
과연 나는 오늘 뛸 것인가?
지하주차장에서 뛸 것인가?
눈도 좀 녹았으니 밖에서 뛸 것인가?
뭐가 됐든 뛰긴 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