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 걸린 대기업 퇴사

퇴사 결심은 죽을 것 같을 때가 아니라 평온할 때 더 확실히 찾아왔다.

by 헤오

2018년, 나는 한 대기업의 마케터 직무로 입사했다. 온갖 신입 교육이 끝나고, 정확히 3개월 후부터 그런 생각이 들었다. "퇴사하고 싶다."

어떤 날은 여느 직장인이 그렇듯 그저 출근하기 싫어 아무 의미 없이 뱉는 말이기도 했고, 어떤 날은 이러다간 내가 죽을 것 같아서 뱉는 말이기도 했다.


하지만 퇴사 결심은 죽을 것 같이 힘들 때가 아니라,

평온해서 재미없을 때 더 확실하게 찾아왔다.




나는 정말 열심히 회사 생활을 했다. 되돌아봐도 후회가 전혀 남지 않을 만큼. 그룹사 전체 신입사원 아이디어 경진대회에서 발표자로 우수상을 받았고, 신입 교육 우수상도 받았다. 현업을 시작하고서도 내부 시상식에서 상을 받기도 했고, 언론 인터뷰도 진행해 내 얼굴이 대문짝만 하게 박혀 있는 기사가 아직도 남아있다. 회사 안에서 고작 한 파트에 2-3명이 만들어낸 전략이 수천만 명에게 공개되는 걸 보면서 재미있고 뿌듯하고 보람찼던 순간들도 분명 많았다.


하지만 야근하느라 해를 한 번도 보지 못하고 지나가는 하루하루, 저연차에게 알려주지 않고 책임만 강요하는 기업 문화, 챌린지라는 명목 하에 비교와 폭언을 서슴지 않았던 상사, 온갖 가스라이팅으로 박살 난 자존감. 스트레스가 일상이 되자 온몸이 비명을 질러댔다. 역류성 식도염, 과민성 대장증후군은 기본이고, 주말에 가만히 누워있어도 심장이 쿵쿵대는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자다가 갑자기 위경련이 온 적도, 대낮에 눈이 잠깐 안 보인 적도, 출근 지하철에서 이명과 동반된 어지럼증으로 중간에 내려서 쉰 것도... 셀 수 없이 많았다.


더 심각한 것은 나의 정신 상태였다. 나의 장점 중 하나는 자존감이 높다는 것이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나는 세상에서 나를 가장 싫어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상사의 기분마다 바뀌는 피드백과 쏟아지는 폭언이 처음엔 짜증이 났다. 하지만 몇 개월 지나자 나는 스스로에게 상사보다 더 심한 말을 하고 있었다. "네가 멍청하니까 그거 하나 제대로 못하지.", "네가 모자라니까 네 인생은 이제 앞으로 나아지는 게 하나도 없을 거야.", "어차피 내리막길밖에 안 남았는데 더 살아서 뭐 하냐?" 처음엔 회사가 문제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이 정도면 등신 같이 멍청한 내가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스스로를 향한 비난은 어떤 방어막 하나 없이 나를 쏘아댔다.


여느 날과 다름없이 야근을 하고 새벽에 택시를 타고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는데 눈에서 눈물이 났다. 내가 불쌍해서라던가, 힘들어서라던가, 슬퍼서라던가 그런 감정 때문이 아니었다. 그냥 내 인생은 망했구나, 앞으로의 인생도 이런 식으로 엉망진창일 것이란 확신이 들어서였다. 옆에서 달리는 차를 보며 문득 차에 뛰어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면 저기 다리로 떨어질까? 머릿속에 경고등이 켜졌다. 나 위험하다, 이건 진료를 받으러 가야겠다.

2020년, 고작 회사를 다닌 지 2년 정도 되었을 때였다. 건강한 20대 후반이었던 내가 신체적, 정신적으로 모두 무너지는 데 걸린 시간은 고작 2년이었다.

당시 낙서처럼 휘갈겨 쓴 일기


이 무렵부터 나는 퇴사를 진심으로 고민했다. 하지만 무서웠다. 대학교 내내 마케팅 학회, 공모전, 인턴 등을 하며 내가 지금 있는 이 자리를 위해 노력해 왔다. 그런데 고작 2년 일하고 그만두면, 나는 신입을 지원할 수 있나? 아니면 경력을 지원할 수 있나? 나이는 더 이상 신입으로 들어가기 애매하고, 경력은 적어도 대리급 이상부터 원하는데... 그냥 못 버티고 도망 나간 패배자가 되면 어쩌지? 다른 데 간다고 해서 지금이랑 많이 다를까? 수많은 물음표들이 나를 주저하게 했다. 실제로 마음을 먹고 상사와 면담을 한 적도 있다.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라 말을 빙빙 돌리다가 결국은 말하지 못했고, '더 열심히 해보렴'이라는 이상한 결론으로 면담이 끝났다. 나는 그냥 무식하게 버텼다. 대신 다른 살길을 틈틈이 살피면서. 그때 교양처럼 시작한 것이 코딩이었다.


죽을 것 같이 힘든 시기도 끝이 있긴 했다. 대대적인 조직개편으로 거의 모든 팀들이 새롭게 구성되었다. 옆에서 나를 가스라이팅하고 괴롭히던 사람이 없어진 것만으로 훨씬 가벼워진 느낌이었다. 그렇게 또 나는 버티며 주어진 일을 했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 힘든 사람들에게 버티는 게 답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다. 나는 운이 좋아서 스스로를 더 망가뜨리기 전에 그 시기가 끝이 났을 뿐이다. 지금 돌아간다면 나는 버티지 않고 바로 퇴사했을 거다.)


어느새 2022년, 죽을 것 같이 힘들었던 그 시기에서 또 2년이 지나 있었다. 일은 여전히 많고 힘들었지만, 합리적이고 따뜻한 상사와 똑똑하고 든든한 사수, 착하고 똘똘한 후배가 있었다. 대리 2년 차, 이제 업무도 손에 완전히 익었고 팀과 유관부서들도 이전만큼 스트레스를 주지는 않았다.


하지만 오히려 그게 도화선이 되었다.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몰라서 힘들었던 예전과 달리, 어떻게 처리하면 될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일들인데 하기가 싫었다. 어느 순간 모든 것이 지긋지긋하게 느껴졌다.


'언제까지 나는 이 일을 해야 하지?

10년, 20년, 30년 후에도 이 일을 한다면?'


후회가 전혀 남지 않을 만큼 4년이 넘는 시간을 내 첫 사회생활에 바쳤다. 아니, 어떻게 보면 처음 마케팅학회에 들어간 2012년부터 10년은 마케팅이라는 직무를 향해 달려왔다. 하지만 더 이상 이곳엔 내가 목표로 삼아 달려가고 싶은 꿈이 없었다. 죽을 것 같이 힘들었던 사원 시절에는 그래도 하고 싶은 꿈이 있었다. 내 제품을 만들어 보고 싶었고, 광고도 크게 해 보고, 내가 직접 짠 전략을 실행해보고 싶기도 했다. 어느 정도 알 건 다 아는 5년 차 마케터가 되어 미래를 바라보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여기서 하고 싶은 건 다 해봤고,

더 이상 이 직무에서 하고 싶은 게 없다!"


그렇게 팀장님께 퇴사 선언을 했다.

이전 01화한 번도 가보지 않은 출구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