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새로운 시작을 할 준비가 되었다.
퇴사를 하기 전, '이 일을 더 이상 하고 싶지 않다'라는 마음이 단순한 슬럼프는 아닌지, 혹은 현실 도피는 아닌지 객관적인 판단이 필요했다. 퇴사를 결심한 시기쯤엔 함께 일하는 사람들도 좋았고, 회사 내에서도 어느 정도 인정을 받고 있었던 때였다. 회사가 주는 안정감과 지금까지 쌓아온 모든 것들을 던져버리고 퇴사하는 것이 정말로 나에게 필요한 결정인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래서 나에게 이런 질문들을 던져보았다.
너무나 명확하게 YES였다. 사람이 싫을 때는 내가 져서 쫓겨나는 기분이 들어 선뜻 퇴사 선언을 하지 못했지만, 직무 자체가 재미없고 이것을 10년, 20년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드니 하루라도 빨리 퇴사를 해야겠다는 마음이 확고해졌다.
사실 마케팅은 남들이 좋다고 해서 시작한 일이었다. 나아가 한두 해 경력이 쌓이니 할 줄 아는 게 이것뿐이어서 하는 일이 되어 있었다. 업무를 하며 나는 마케팅을 좋아하지 않는다라는 생각이 자주 들었지만 꾹꾹 참아왔었다. 애써 눌러왔던 본심은 결국 폭발했다. 나는 마케팅을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았다. 이 회사에서든, 다른 회사에서든.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회사 내에서 부서 이동을 시켜준다고 하더라도, 나의 이전 업무와 완전히 무관한 업무로 보내줄 리가 없었다. 결국 옮긴다고 해봤자 비슷한 기획 업무를 해야 하는 게 뻔했다. 나는 이제 기획과 같은 일들을 하고 싶지 않았다.
실제로 퇴사 선언 후에 다양한 팀들로 옮기는 제안도 받았지만, 당시 30대 초반이 직무 전환을 할 수 있는 마지막 시기라고 생각해 퇴사로 마음을 굳혔다.
가장 깊이 고민했던 부분이다. 왜 마케팅이 싫었는지, 그래서 나는 무엇을 좋아하는 사람인지. 직무에 나를 끼워 맞추기보다는 내 특성에 맞는 일을 찾고자 했다.
1) 인과관계가 명확한 체계적인 업무
마케팅은 인과성이 불분명하다. 똑같은 전략이 어떤 날은 대성공을 하고 어떤 날은 대실패를 한다. 소비자 데이터도 모호하다. 수백, 수천만 원의 비용을 투자해 소비자 조사를 해도 건져낼 수 있는 인사이트는 별로 없다. 제조업을 다녔기 때문에 IT나 금융 기업처럼 소비자 행동 데이터를 수집하는 것은 더욱 어려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항상 내 추측으로 얼마 안 되는 데이터들 사이에 그럴듯한 인과관계를 만들어내 보고 자료와 전략을 짜내야 했다. 나 스스로도 설득되지 않는 논리로 남을 설득해야 한다는 것이 지쳤다. 인과관계가 불명확하다 보니 성과가 났을 때 숟가락을 얹는 사람도 너무 많다. 성과가 안 나면? 다 마케팅이 전략을 잘못 짠 탓이 된다.
회사에서 내 성과를 "내가 했다"라고 명확히 말하지 못하는 것만큼 답답한 일이 있을까?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어느 정도 인과관계가 명확한, A를 넣으면 A에 가까운 결과가 나오는 그런 일을 하고 싶었다.
2) '나'의 기술을 쌓을 수 있는 업무
내가 다녔던 회사의 마케팅 직무는 흔히들 알고 있는 광고나 커뮤니케이션보다 훨씬 많은 종류의 업무를 해야 했다. 밸류체인의 중심에서 내 제품의 개발, 생산, 물류, 손익, 광고, 영업 등 모든 것을 관리해야 했다.
비즈니스를 총괄하고 싶은 사람에게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고, 나 역시 저연차에는 모르는 것 투성이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새로운 것을 배워나가는 재미로 일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내가 성장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관성적으로 처리하는 업무들이 점점 늘어났다. 한창 코로나로 모든 게 디지털로 빠르게 바뀌고 있는데 이 산업에서는 나 스스로가 너무 정체된 느낌이었다.
대리가 되었는데 나는 어떤 분야의 전문가라고 할 수 있는지, 내세울 게 없다고 느껴졌다. 나는 계속해서 발전을 추구하는 사람이었는데 어느 순간 도태되고 있다는 느낌이 드니 견딜 수가 없었다. 나만의 뾰족한 기술을 지속해서 쌓아갈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었다.
3) 요청 '드리지' 않고, 내가 무언가를 요청 '받을 수 있는' 업무
나는 주체적으로 내게 주어진 일들을 처리해 나가는 것을 좋아한다. 하지만 내가 했던 대부분의 업무는 유관 부서들 사이에서 전략만 기획하고 실행은 다른 팀에게 요청하고 관리하는 역할이었다. 가장 많이 썼던 메일의 단어는 '요청드립니다', '검토 부탁드립니다'였고, 가장 많이 했던 통화는 '언제까지 해주세요', '확인해서 주실 수 있으세요?'였다.
내 손으로 직접 하지 못하고 남의 손에 맡겨 언제 되냐고 재촉하는 역할만 해야 한다는 게 답답했다. 나는 주체적으로 내가 무언가를 만들어가는 일을 하고 싶었다.
4) 생산성을 향상할 수 있는 자동화, 효율화를 하는 업무
그나마 내가 했던 일 중에 제일 재미있었던 건 '엑셀질'이었다. 행사 세팅할 때의 손익 로직이나, 연간 매출/물량/판가 계획을 짤 때, 원가 예상할 때 등 매번 반복되는 작업을 엑셀 수식들로 자동화 툴을 만드는 것이 재미있고 뿌듯했다. 딱딱 떨어지는 논리를 세우고 비효율적인 업무들을 없애 갈 때의 그 쾌감이 4년 동안 한 일들 중 가장 적성에 맞았다.
그래서 나는 개발을 공부해보고 싶어졌다. 내가 전혀 모르는 세계이지만, 논리적이고 명확한 업무이면서도 나의 기술을 쌓을 수 있고, 그 기술을 기반으로 내가 주도적으로 일할 수 있는 분야라고 생각했다.
직장을 다니며 동기들과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다. 고등학교 때는 좋은 대학, 대학교 때는 좋은 직장이라는 목표가 항상 있었는데, 직장에 들어오니 이제 목표가 없어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내가 어떤 일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도 모른 채로 남들이 좋다는 마케팅 직무, 직장을 선택해 왔었다. 30대가 되면서 좋은 점은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 사람인지, 어떤 사람인지 20대 때보다 훨씬 더 잘 알게 되었다는 점이다.
20대처럼 남들에게 휩쓸려하는 선택이 아닌, 오롯이 내가 내린 선택으로 앞으로의 미래를 그려나가고 싶었다. 그리고 나는 아직 고작 30대, 너무 젊지 않은가? 나는 지친 게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하고 싶었다.
이보다 더 좋은 시기에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을까?
나는 새로운 시작을 할 준비가 되었다!
이 모든 질문을 던지고 퇴사를 선언했을 때, 끝을 알 수 없는 길을 처음 걸어가는 기분이었다. 당연히 불안했다. 내가 정말 잘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도 있었다. 또한 내가 가려는 길에는 수많은 벽들이 존재할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후회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은 있었다. 무언가를 끝내고 새로운 시작을 하려는 사람들은 모두 사실 불안할 것이다. 내가 지금까지 해온 모든 것들이 무너지는 것은 아닌지, 다시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건 아닌지, 미래가 완전히 실패해 버리는 건 아닌지.
하지만 불안할 땐 손에 쥐고 이뤄온 것들을 생각하면 된다.
여기까지 오게 한 그 용기가, 앞으로의 길도 열어줄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