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를 앞두고서야 보이는 것들

쌓아온 것들은 사라지지 않는다.

by 헤오

퇴사 선언 후, 몇 차례 면담을 했고 퇴사 날짜를 확정했다. 3주 후에 회사를 그만두기로 했다.


퇴사를 확정하고 나면 100% 기쁘고 홀가분할 줄 알았지만 정반대였다. 순도 100%의 두려움이 급속도로 밀려들어왔다. 내가 정말 질러버렸구나, 잘하는 짓일까? 이윽고 아쉬움도 함께 찾아왔다. 하기 싫어서 미간을 찌푸리며 걷던 출근길이 얼마 남지 않게 되니 애틋해졌다. 괜히 궁상맞게 회사의 이곳저곳을 사진으로 남겼고, 때때로 추억에 잠기기도 했다.


직장 생활을 하는 내내 스스로를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그냥 닥치는 대로 눈앞에 있는 것들을 해치우고, 주말이면 대부분 쓰러져서 잠만 잤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는데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는 모래를 쥐고 있던 것처럼 이룬 게 없어 보였다. 그래서 더 아쉬웠다. '좀 더 열심히 해볼걸'이라는 종류의 아쉬움도 있었고, 어차피 '이렇게 될 거 그냥 더 빨리 퇴사할걸, 시간 낭비했네'와 같은 후회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 끝이 정해졌다.

나는 내 첫 회사와 잘 마무리하고 싶었다.




회사와 잘 헤어지기 위해 버려야 하는 것들

흔히들 대기업에서 사람은 언제든 대체될 수 있는 부품에 비유되곤 한다. 맞는 말이다. 퇴사예정자의 가장 큰 업무는 '나라는 부품이 문제없이 대체될 수 있도록 인수인계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내가 가진 모든 업무들을 털어내고 버려내야 했다.

최대한 내가 가진 시간 안에서 해결할 수 있는 일들은 모두 처리했다. 타임라인이 불가능한 업무들은 다음 업무자가 나 없이도 이해할 수 있게끔 모든 히스토리를 정리했다. 이후 상황별로 해야 할 To-do까지 모두 작성해 줬다. 퇴사하고 나서 다시는 이 회사로부터 업무 연락을 받고 싶지 않았다.

모든 걸 다 하고 나니 인수인계 폴더 하나가 덩그러니 남았다. 그래도 이 회사에서 오랜 시간 많은 일을 했는데, 남는 건 이 폴더 하나라니... 조금 씁쓸했다.


그럼에도 사라지지 않는 것들

회사라는 기계에서 나의 자리는 사라졌지만, 나라는 사람과 그 역사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퇴직 메일을 보내고 함께 일했던 많은 동료들로부터 수많은 메시지를 받았다. 나는 몰랐던 나의 모습들, 그들이 생각했던 나의 역량과 장점들을 읽다 보니 무언가 보상을 받는 기분이었다. 이 안에서 헛된 시간을 보낸 건 아니구나라는 안도감도 들었다.

마지막으로 이력서에 적을 정보들을 정확하게 기록하기 위해 나의 지난 4년을 돌아봤다. 신제품 출시 1년 만에 000억 매출 달성, 연간 온라인 매출 000% 신장 등과 같이 생각보다 많은 성과들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런 것들보다 나한테 가장 크게 남은 것은 다른 것이다.

그건 바로 나에 대한 믿음이다. 회사 안에서 해냈던 크고 작은 성공들을 반추하는 과정에서 과거의 내가 참 대단해 보였다. 할 수 없다고 믿었던 것들을 해냈고, 힘들었던 날들을 견디며 나를 성장시켜 지금 이 순간에 도달했다. 퇴사 후 미래에 대한 불안감 속에서 과거의 경험은 나에게 묘한 위안과 어떤 확신을 만들어줬다.


할 수 있다, 늘 그래왔던 것처럼.




‘익숙함’에 마침표가 부여되는 순간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보인다. 퇴사라는 멈춤을 나에게 주지 않았다면, 나는 뒤돌아보지 않는 경주마처럼 달리다 지쳐 쓰러졌을 것이다. 흩날리는 모래처럼 내 손을 빠져나갔다고 생각했던 시간과 경험들은 사라지지 않고 단단한 모래성으로 쌓여 있었다. 사업을 바라보는 시선, 업무를 처리하는 사고방식, 사람들과 함께 일하기 위한 태도 등 많은 것을 배웠다. 사라지는 건 대기업 마케터라는 직함 하나일 뿐, 나의 근본과 뿌리는 더 단단해져 있었다.


퇴사를 확정하고 나서 느꼈던 두려움은 3주라는 시간이 흐르며 설렘으로 바뀌었다. 처음 이 회사 출근길에 품었던 설렘을 이제 새로운 시작을 향해 품기로 했다. 그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이제는 빈 손이 아니라는 것이다. 내 안에 쌓아온 모든 경험과 성장, 도전과 용기가 함께한다.


퇴사와 함께 드디어 새로운 장의 시작에 섰다.

언제나 그렇듯 이 장에도 끝이 있을 것이고, 나는 언제나 모든 장을 잘 넘어왔다.

그러니까 이제 할 수 있는 방법에만 집중하면 된다.




아래로는 저의 마지막을 조금 공유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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