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기억

악마를 보았다.

by 여니


병원을 두세 번 정도 방문했을 당시, 원장선생님은 엄마에게 아버지와 함께 동행을 해달라 부탁했다. 탐탁지 않았으나 엄마의 권유로 길을 따라나선 아버지의 얼굴은 불만이 가득했다. 병원을 도착해 엄마가 먼저 원장실로 들어가 상담을 진행하는 동안 나와 아버지는 둘이서 대기실에 머물렀다.


평소 가만히 있질 못하는 성격이던 아버지는 이리저리 기웃거리다 잡지책들이 진열되어 있는 곳에서 책을 한 권 집어 들고 와 내 옆자리에 털썩 앉았다. 병원로비에 TV화면을 응시하던 나를 손가락으로 쿡쿡 찔러 주의를 이끌었다. 시선을 돌려 아버지를 쳐다보았을 때, 잡지책 한 장면에 어느 외국인여성이 상의를 탈이 한채 시위를 하는 사진이 나와있었다. 그 사진을 가리키며 뭐가 즐거운지 '키득키득' 웃었다. 이내 나를 찔렀던 손가락으로 잡지 속 여성의 젖가슴을 어루만졌다.


장소구분 없이 몰상식한 행동과 수치심을 안겨주는 아버지가 너무너무 싫었다. 화가 나 울분을 삭이고 있을쯤 엄마의 상담이 끝나 원장실을 나왔다. 서둘러 펼쳐져있던 잡지책을 덮고 다음차례인 아버지가 들어갔다. 내쪽을 향해 걸어오던 엄마는 좋지 않은 안색을 들여다보고 무슨 일 있었냐며 질문을 했다. 목구멍 사이로 뜨거운 용암 같은 것이 올라왔다 내려갔다를 반복하는 기분이었다. 떨리는 입술사이로 뱉은 말들과 함께 눈시울이 붉어져갔다.


엄마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어깨를 감싸 안아 다독여 주었다. 보고 싶지 않은 것들을 눈에 담은 게 싫어 어깨에 기댄 채 눈물을 훔치고 있는 동안 원장실에서 아버지의 온갖 욕설들이 난무해 문밖으로 터져 나왔다. 그 소리에 놀라 프런트에 계시던 선생님들과 엄마는 다급히 원장실로 달려갔다. 문 열림과 동시에 비친 광경은 원장선생님의 멱살을 잡고 죽일 듯이 욕을 퍼부어대는 아버지 모습이었다.


악마가 있었다면 이런 형상이었을까? 한바탕 소란이 끝난 후 엄마는 죄인이 된 듯 허리 굽혀 선생님들께 돌아가며 사과했다. 어색한 웃음으로 괜찮다고 하시던 선생님들의 모습이 기억난다. 사과를 해야 할 사람은 도망치듯 병원 밖을 뛰쳐나가버렸고, 엄마의 허리는 90도로 꺾여있었다.

나는 어른들의 눈치만 보며 시선은 바닥을 향해 떨궈져 있었다.


'가족'이란 단어 속에 연대책임을 지어야 하는 우리 모녀는 곯을 대로 곯아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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