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행사에서 제안서는 이렇게 씁니다.
제안서 제출 기간은 다음 주 화요일까지입니다.
제안 참여 여부 회신 부탁드립니다.
생일 다음날, 참여한 미팅에서 급작스런 제안 참여 요청을 받았다. 회의 참석일이 월요일, 제출일이 다음 주 화요일이라고 하면 제안서 작성에 쓸 수 있는 시간은 주말을 포함해도 딱 일주일이다. 회의 참석 이후 회사 내부에서 고민 끝에 제안 참여 여부가 결정됐고, 이렇게 내 삶은 제안서 작성 모드로 진입했다.
햇수로 9년 차, 만 8년 차인 대행사 생활 속 제안서 작성은 자주 있는 일이다. 숫자를 정확히 헤아려 보지 않았지만, 평균적으로 1년에 최소 4번, 많으면 8번, 1년 12달 중 2달에 한번 꼴로 제안서 작성에 들어간다. 제안서 작성에 들어가는 평균적인 준비 기간은 2주, 길면 3주 정도 되지만, 이번처럼 일주일 만에 제안서를 달라는 경우도 생각보다 많이 있다.
2달에 1번, 평균 준비기간 2주라는 소리는, 1년에 3개월 정도는 제안서 작성 기간에 투입된다는 말이다. 명절, 휴가철 등등을 제외하면 생각보다 자주 제안서 작성 모드로 라이프스타일을 전환한다. 제안서 작성 모드라고 이름 붙인 것은 제안서 작성을 위해서는 야근은 필수이기 때문이다.
제안서 작성에 야근이 필요한 이유는 이전 글에도 설명했듯이 대행사의 수익 구조에 있다.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 대행사에 입사했다고 가정하자. 신생 기업이 아닌 경우 회사에는 진행 중인 프로젝트가 있다. 최상의 서비스를 제공하기로 하고 대행사는 고객사와 계약했기 때문에 9시부터 6시까지 주 업무시간에는 현재 고객사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의무이자 도리다.
이런 상황 때문에 새로운 프로젝트로 추가 수익을 남기기 위해서는 야근이 필요하다. 4-5명의 직원이 투입돼 짧게는 50장, 길게는 200장이 넘지만, 파일 한 장을 만드는데 그렇게 긴 시간 야근이 필요할까라는 의문을 가질 수도 있다. 이걸 이해하기 위해서는 통상적인 제안서 작성 준비 과정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다.
대행사는 특정 분야의 업무를 대신해 주는 전문가들이다. 특정 산업분야에 전문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닌 특정 직무(광고, 마케팅, 컨설팅, 디자인 등)에 강점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있는 집단이다. 방법론적으로는 최선의 솔루션을 보유하고 있지만, 제안을 받는 고객사가 속한 산업군에 대한 이해도는 전무한 경우가 많다. 제안서를 작성하는 팀원 중 특정 산업군에 대한 이해도가 높은 사람이 있거나, 업무 경력 중 동종 산업군에 비슷한 제안서를 작성해 본 경험이 있다면 작성 시간을 조금이라도 단축할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해당 산업군에 대한 '공부'기간이 필요하다. 자료조사 기간은 길면 1주일, 짧으면 2-3일 정도 걸린다.
자료조사 기간이 끝나면 본격적으로 문제 해결을 위한 솔루션을 만드는 시간이다. 제안서가 하나의 글이라면 솔루션은 대행사의 주장에 해당하는 것으로 제안서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솔루션은 정답이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자료조사를 해온 다양한 자료들과 고객사의 특성을 고려해 아이디어를 고민하고 또 고민한다. 아이디어를 잘 살려주기 위한 크리에이티브(디자인, 영상 등) 이 필요하다면 디자인/영상 등 제작 파트에 협력을 요청한다. 이 기간은 길면 제안서 제출 2-3일 전까지도 하는 경우가 많지만, 통상 2주의 제안 기간 중에는 약 1주일을 자료조사와 솔루션 아이디어 작업에 투자한다.
나머지 일주일은 업무를 배분해 디테일한 아이디어를 보강하고, 장표(PPT 파일)를 만든다. 보통의 프레젠테이션 시간은 30분 정도이기 때문에 시각적으로 듣는 사람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장표를 구성한다. 장표 작성은 내용을 이해하고 시각화하는 것이 핵심이기에 장표 한 장 한 장에 정성을 들인다. 종합광고대행사의 경우에는 기획파트에서 텍스트 형태의 제안서를 만들고 디자인 파트에서 제안서까지 모두 만들어주는 경우도 있다고 하나, 작성 시간의 촉박함 때문에 필요한 파트만 금손들의 도움을 받는 게 일반적이다.
짧은 시간 동안 처음 접한 산업군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창의적이면서 실현 가능한 해결책을 만들어야 하고 논리적이면서도 동시에 이해하기 쉽도록 문서를 구성하는 일은 생각보다 어렵다. 특히 대행사가 하는 많은 영역의 일은 전문가가 아니어도 누구나 쉽게 피드백을 할 수 있는 영역의 일 (소셜미디어, 영상, 디자인 등)이 라 고객사가 의문을 품을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보완 논리를 보강하는 등 제안서 제출 전까지 고려해야 할 사항들이 많다.
2주 동안 바쁘게 돌아가는 제안서 작성 업무 때문에 제안서 작성 모드에 돌입하면 대행사 직원의 일상은 깨진다. 미라클 모닝, 퇴근 후 운동과 같이 여유시간을 활용해서 하는 루틴은 물리적인 시간이 없어 지키기 어렵다. 심야-새벽 퇴근이 많기 때문에 피로도 쌓인다. 제안서 작성 모드를 끝내고 나면 누적된 피로로 인한 떨어진 면역력으로 몸이 많이 상하는 것을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럼에도 대행사의 업무의 꽃은 제안서 작성이라는 선배들의 말에는 일리가 있다. 서먹했던 팀원들도 제안서 작성 기간에 밀도 높은 시간을 공유하면 팀원 전체가 정서적으로 친밀해진다. 다양한 산업군에 대해 분석하고 아이디어를 내보면서 루틴한 업무에서 벗어나 업무적인 능력도 크게 성장할 수 있다. 직원 개인 커리어면에서도 제안서 작성을 통해 접해보지 못한 산업군의 업무를 간접 체험하며 나에게 맞는 산업군을 탐색하는 계기로 삼을 수 있다. 가장 중요한 건 제안서 작성 기간 몸과 마음을 들여 고민하고 고생한 경험들은 내 몸에 업무 경험치로 남아 성장의 동력이 된다.
어제 올해 첫 번째 제안서를 제출하고 제안서 작성 모드에서 벗어났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지만, 언제 다시 제안서 작성 모드로 돌입할지는 알 수 없다. 제안서 작성 모드가 루틴을 깨고, 내 일상을 망가뜨리는 시간일 수 있다. 하지만 대행사 업무의 매력을 느껴 업계를 벗어나지 않는다면 제안서 작성은 피할 수 없는 업무이자대행사의 핵심 업무다.
나 역시 제안서 작성 후 몸이 많이 상하기도 하고 가족과 시간을 보내기 어려워 아쉬움이 크지만, 제안서 작성 업무 자체는 즐기려고 노력하고 있다. 올해 얼마나 많은 제안서를 작성할지 모르겠다. 극 J인 나에게 루틴이 깨지는 건 유쾌한 일은 아니지만 동료들과 함께 올해는 작년보다 조금 더 즐기면서 제안서 작성 업무에 임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