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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yeon Oct 04. 2016

2016  대구사진비엔날레 (1)

소수자들을 대하는 그들의 시선

친구와 대구사진비엔날레 전시를 보기 위해 대구문화예술회관을 찾아갔다. 길을 잘못 드는 바람에 두류공원 산책이 아닌 등산 후에 도착한 곳이었다. 진이 빠진 우리는 갑자기 ‘전시 관람’이 노동처럼 느껴져 전시를 볼 것인지 말 것인지 고민했다. 잠시 고민하며 쉰 덕에 다시 힘이 나 전시를 관람하기로 했다. 그렇게 보게 된 전시라 그런지, 눈길을 확 잡아끄는 사진들과 온전히 나의 취향에 부합하는 사진들 몇몇이 기억에 남았다. 내가 가지고 있었던 1시간 30분이라는 시간이 부족했던만큼 너무 많은 사진이 전시되어 있어 호불호의 판단을 제외하고는 부차적인 생각들을 할 시간조차 없었다. 그래서 작가들을 메모해왔고, 그들과 그들의 사진에 대해서 조금 찾아봤다.     


1 Bruce Gilden      



그의 연작 'FACES' 중 세 장의 사진이 이번 전시회에 소개되었다. 이 사진은 그중 하나고, 수위가 제일 약한 사진이지만 여드름이 채 지워지지 않은 소년의 얼굴에는 여느 소년들에게서 찾아볼 수 없는 불행이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다. 다른 사진들 역시 온갖 상처가 담긴 얼굴을 극도로 가까이에서 찍은 것으로, 그 자체로 충격적이었다. 세 장의 사진만으로 세상의 모든 불행을 모아놓은 것 같았다. 무표정한 인물들의 얼굴에서는 고통에 이미 무뎌질 대로 무뎌져 버린 그들의 삶이 보였다. 그들의 상처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 싶어 사진에 가까이 다가갔다. 하지만 사진을 자세히 보면 볼수록 그들의 불행이 주는 충격은 생동감을 잃었다. 상처는 작위적으로 느껴지기도 했고, 그들의 무표정에서 나오는 무감각은 인위적으로 느껴졌다. 그렇게 나는 다른 사진들로 발걸음을 옮겼다.    







돌아와 찾아본 사진들은 훨씬 더 자극적이었다. 사진에 담긴 얼굴은 불행에 휘말린 삶처럼 뒤틀려 있었고, 고통에 얼룩진 그들의 내면이 얼굴 곳곳 흉터로 남아있는 사진들이었다. 혹은 우리가 평범하다고 생각하는 종류의 인상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었다. 누군가는 팝스타처럼, 누군가는 어떤 이미지의 전형처럼 보이기도 했고, 누군가는 실제 인물인지 하는 의문까지 들 정도였다. 여기까지 생각한 뒤, 아래의 기사를 접했다.    





"Gilden may be shoving these broken faces in our faces to confront us with what we usually choose to look away from. But his style seems to work against any intention to humanise his subjects. First and foremost, I feel uncomfortable as a viewer – not because of the poverty or abuse etched on to the landscapes of these faces, but because their perceived ugliness is paraded as a kind of latter-day freak show."


Chris Klatell이라는 비평가의 글을 인용해 Bruce Gilden의 ‘FACES’를 비판한 기사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그는 기사의 제목 그대로, Bruce Gilden의 사진을 피사체로 담긴 이들의 고통을 맥락 없이 전시한 잔인한 ‘Freak Show’라고 비판했다. 그런 시선을 읽고 나니, 내가 왜 사진을 가까이에서 봤을 때 공감이 아닌 거부감을 느꼈는지 알 것 같았다. 사람의 얼굴에는 많은 것들이 담겨 있다지만 모든 것을 알 수는 없다. 이 사진들도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의 고통과 상처가 보이지만, 그것에 공감할 수 있는 맥락적 요소들이 배제되어 있다. 그래서 이 사진은 단순히 그 고통과 상처를 전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더군다나 인위적으로 보이는 설정과 과도한 플래시, 후보정은 마치 연출사진처럼 느껴지게 한다. 또한 그들의 외형적 특이점들은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한 것만 같다.




"I’m photographing people that are not only left behind in most cases, but they’re actually invisible because people don’t want to see them."


"I’ve always liked the underdog, people who aren’t on top of the heap. And not all the pictures are of underdogs, but part of the book is pictures I did for a commission in the Midlands, for a group called Multistory."


"The world isn’t great, ok? Look what’s going on in the world. from the environment, we’re polluting the world, to terrorism, to everything. Then you have all the governments and the politicians who are all full of shit, they never tell the truth, they’re always promoting what the best deal is for themselves… I mean, come on! So, my pictures are showing that there are problems in this world. I think that the only way you can solve a problem is by confronting it. I’m an optimist."


하지만 어쨌든 우리가 외면하고자 했던 어두운 현실을 우리 앞에 떡하니 가져다 놓은 것만으로도 의의를 가지는 사진이기도 하다. 작가는 사진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찾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것처럼, 나는 타인의 고통에 대한 윤리를 운운하며 그 모습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와 그들을 분리하고 안도하려는 비겁한 생각의 발로로서. 그래서 그의 사진은 단순히 고통의 전시가 아니라, 그 고통과 우리를 이어주는 매개일지도 모른다. 사진에 모든 것을 담아두길 바라는 것도 욕심이다. 의문을 떠올리고, 그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 행동하는 것. 관람이라는 것은 단순히 보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 행위다. 그가 소수자들을 대하는 시선은 작위적으로, 폭력적으로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의 사진은 누군가가 의문을 갖게 하고, 행동을 추동한다는 점에서 충분한 가치를 가진다.


                                                                                              이미지 출처 : http://www.brucegilden.com/



2 Ryuichi Ishikawa


아름다운 자연과 휴양을 즐길 수 있는 섬으로 알려진 오키나와에서 활동하는 사진작가, 이시카와 류이치의 사진이다. 오키나와에서 나고 자랐다는 그의 사진은 우리의 시선 속 오키나와처럼 마냥 아름답지는 않다. 사진을 구하기가 힘들어 전시회장에서 본 사진을 이 글에 옮겨 담을 수는 없었지만 그의 사진 속 인물들은 모두 어딘가 부족해 보이는 모습들이었다. 왼쪽 사진처럼 쪼리를 신고 물웅덩이에 발을 담근 채로 찍혔다던지, 엉성하게 붙인 속눈썹이 티가 나는 여자의 얼굴 등이었다. 평범한 스냅샷처럼 보이기도 하는 그의 사진들은 연작 속에서 감상할 때 더욱 인상적이었다.


 

사실 전시회에서는 작품명이 없어(못 본 것인지도 모르고) 이것이 'Okinawan Portraits'인 줄도 몰랐다. 오키나와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고 나니 역사적 지식이 부족한 나는 아름다운 오키나와의 이미지와 대조되는 사진에 더욱 관심이 갔다. 오키나와의 역사적 배경 등에 간단히 검색한 결과를 요약하자면, 오키나와는 원래 류큐국이라 불리던 독립국이었고 무역이 활발했던 만큼 다양한 문화와 인종이 어울려 살던 섬이었다. 하지만 1879년 메이지 정부에 의해 일본에 편입당한 뒤 세계대전에서는 일본의 총받이 노릇을 해야 했다. 지금도 일본에서 미군이 가장 많이 상주하고 있는 곳으로서 그와 관련한 사건들이 끊임없이 벌어진다고 한다. 오키나와 출신 가수인 아무로 나미에가 기미가요 제창을 거부한 일화를 알게 되면 일본에 대한 오키나와 사람들의 억하심정을 어느 정도는 가늠할 수 있는 듯하다.



어쨌든 다시 작품 이야기로 돌아가서, 그런 아픈 역사적 배경이 있는 만큼 오키나와를 향한 내부와 외부의 시선이 극명하게 갈리는 것이다. 이시카와 류이치는 오키나와 외부에서 볼 수 없는 것들을 사진으로 보여준다. 오키나와의 숨겨진 면면들이 그의 사진을 통해 드러나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는 역사적 배경으로 인한 오키나와의 상처들만을 사진에 담는 것은 아니다.(물론 내가 사진 속에서 읽어내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다) 공식 사이트가 없는 그의 사진들을 찾다 보면 소수자를 담은 사진이 훨씬 많다. 아마 인터뷰에서 밝혔듯 그는 애초에 어떤 생각과 의도를 가지고 사진을 찍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단지 어떤 순간에 셔터를 누를 뿐이라고 말했다. 그러니 그의 사진들은 아마 그가 자라오며 보고 겪었던 것들로부터 느낀 무의식의 집합이 아닐까. 인터뷰를 보면 그 생각이 좀 더 명확해지는데, 그는 아방가르드 무용을 이해하기 위해 사진을 찍어둔 것을 시작으로 사진작가의 길을 걷게 되었다고 한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사진을 통해 자신이 찍은 대상에 대해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사진들은 소수자들의 삶을 담았음에도 그리 퍽퍽하고 어두워 보이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사진으로서 그들을 사회적 소수자가 아닌 개성인이라는 생각을 하게끔 만드는 것이다. 그는 오키나와라는 지역적 특수성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받아들이는 것외에 방법이 없음을 담담히, 그리고 담대히 인정했다. 그것이 바로 그가 사진 속 소수자들을 편견 없이 대할 수 있었던 이유다.


                                                                                                                                   이미지 출처 : 구글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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