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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yeon Dec 19. 2016

<I, Daniel Blake>

어찌할 수 없는 통속적인 삶의 앞에서.



영화 <I, Daniel Blake>의 주인공 다니엘 블레이크(이하 ‘댄’)에게 갑자기 심장병이 찾아왔다. 40년간 목수 생활을 해온 댄은 당분간 일을 쉬어야 한다는 의사에 진단에 정부에서 지원해주는 질병 수당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케이티는 런던의 비싼 집세를 감당하지 못하고 데이지와 딜런, 두 아이를 데리고 뉴캐슬로 이사 왔다. 댄과 케이티가 만난 곳은 기초 복지에 관한 업무를 담당하는 사무소였다. 그때 케이티는 자신을 제제 대상에 올리겠다는 직원의 통보를 받았다. 지리에 익숙지 않은 탓에 약속한 상담시간에 고작 몇 분을 늦은 것이 이유였다. 당장에 수당이 급한 케이티가 할 수 있는 일은 항의하는 것뿐이었다. 상황을 지켜보던 댄이 아무런 연고도 없는 케이티를 위해 직원들에게 따지며, 다른 이들의 동조까지 얻어냈으나 케이티와 댄은 직원들이 고수하는 원칙 앞에서 어찌할 수 없었다. 암흑 속에서 대화만이 오고 가는 오프닝 씬에서 댄을 대하는 직원의 기계적인 태도가 그랬듯 만사가 남의 일이 되어버린 세상이다. 우리는 누군가와 마주하며 대화를 하지만 그 누군가는 표정이 없다. 우리는 딱딱해진 세상 앞에서 한숨을 쉬다가도 세상의 공기를 다시 들이켜고 나면 어느새 다른 누군가에게는 다를 바 없는 사람이 돼버린다.   



어찌 보면 이 영화는 참 통속적이다. 댄의 삶은 본질을 상실하고 과정과 원칙을 앞세우는 정부의 지원제도로 인해 망가진다. 그러면서도 케이티의 가족을 돕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전기가 끊어진 케이티의 집을 보고 전기요금을 테이블 위에 놓고 가기도 하고, 케이티 대신 데이지와 딜런을 살뜰히 챙긴다. 그러다 질병 수당 부적격자 판정에 대한 항고에 자신감을 보이는 복지사를 만난 그 날, 댄은 심장마비로 화장실에서 쓰러진다. 심폐소생술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댄은 아무런 반응이 없다. 케이티도 처음에는 삶의 낙관을 잃지 않는다. 일과 학업을 병행하며 자신의 꿈을 이루고자 한다. 하지만 케이티가 할 수 있는 일은 도처에 널려 있지 않고, 케이티는 아이들을 위해 자신의 끼니를 거르는 것이 일상이다. 절대로 익숙해질 수는 없는 일상적인 허기에 케이티는 식료품 지원소에서 갑자기 통조림을 뜯어먹는 돌발행동을 한다. 수치스러운 것도 알고, 아이들의 정서에도 좋지 않을 것을 알지만 케이티는 자신을 통제할 수 없었다. 생계형 범죄였지만 슈퍼에서 도둑질까지 하게 된 케이티는 결국 벽에 부딪힌 ‘여성’의 전형적인 선택으로 여겨지는 성매매에 발을 들인다.



그럼에도 이 통속적인 영화를 진부하다고 비난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들의 삶이 왜 그렇게 됐는지, 당위가 생략되어 있는 댄과 케이티의 삶이 작위적이라고 감독을 비판할 수도 없다. 그럴 수 있는 사람은 타인에 대한 최소한의 공감마저도 불가능한, 형식을 앞세우며 댄과 케이티를 내몰았던 사무소 직원들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사무소 직원들 역시 만들어진 구조 속에서, 댄과 케이티처럼 되지 않으려고 발버둥 칠 뿐이지만 그들은 최소한의 인간성을 상실했다. 댄과 케이티 같은 사람들에게 우리가 우선해야 할 것은 댄이 특별한 동기 없이 케이티에게 베풀었던, 그 친절이다. 댄이 말했던 것처럼, 우리는 서로가 최소한의 자존심을 잃지 않을 수 있도록 관심을 가져야 한다. 댄이 되기 위해 고민해야 한다. 댄은 장인이라고 부를만한 40년 경력의 목수지만, 그가 마지막에 만든 것은 대단한 명품 가구가 아니라 데이지를 위한 물고기 장식걸이였고 케이티를 위한 책장이었다. 거창할 것만 같은 인간의 존엄이란 겨우 그런 것이다. 그 정도의 위로만 있어도 우리는 삶을 낙관하는 희망을 잃지 않을 수 있다. 



한창 덥던 7월쯤의 일이 기억난다. 영화를 다 보고 1층으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한 어머니가 아들과 딸에게 말했다.     


“너네끼리 영화 보고 나오라니까.”     


아이들은 머뭇거렸고 어머니는 결국 아이들을 데리고 나와 같은 엘리베이터를 탔다. 사실 나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면서 영화티켓 값이 왜 이렇게 비싸냐는 어머니의 혼잣말을 들었다. 내려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도 어머니는 초등학교 5학년씩이나 돼서 엄마 없이 영화도 못 보냐고 아이들을 나무랐다. 자신들끼리 영화를 보면 엄마는 혼자 밖에서 무얼 하냐고 되묻는 아이들의 말에는 그 흔한 투정도 섞여있지 않았다. 욕심이 없던 아이들의 말은 볼멘소리도 아니었고 다 이해한다는 듯 달관의 어조였다. 나는 그 어머니의 표정을 볼 자신이 없었다.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귀에 이어폰을 꽂고 급한 일이 생긴 사람처럼 자리를 떴다.     


그러니까 댄이 되는 것은 '고작'정도의 노력으로 가능하지 않다. 누군가의 고통을 쳐다보는 것조차 어렵다. 나는 데이지, 딜런이었기에 영화로 그들을 마주하며 값싼 눈물이라도 흘릴 수 있었다. 매번 CGV 아트하우스에서 영화를 보지만 이 영화를 봤던 날만큼 상영관이 가득 들어찼던 적은 없었다. 영화가 끝나고 나는 눈가를 닦고 있있었고 누군가는 한숨을 쉬고 있었다. 다른 누군가들은 그런 사람들이 신기한 것 마냥 주위를 흥미로운 시선으로 둘러보고 영화관을 나갔다. 사실 어찌할 수 있는 노릇이라는 게, 애당초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들은 같은 공간에 있으면서도 서로를 보지 못하는 영화관의 어둠과 같은 것에, 여태껏 익숙해져 버렸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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