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hyeon Jan 26. 2017

<시카리오 : 암살자의 도시>

선과 악의 회색지대

1 ‘과 이 나뉘는 국경도시 후아레즈와 엘 패소


<시카리오 : 암살자의 도시>는 멕시코의 ‘후아레스’, 미국의 ‘엘 패소’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지역을 영화의 배경으로 삼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국경도시라는 공간 설정은 그 자체로서 <시카리오>를 통해 드뇌 빌뇌브 감독이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의 상징이다. 

    

미국과 멕시코가 국경을 맞대고 있는 많은 국경도시 중에서, 하필이면 왜 후아레즈와 엘 패소였을까? 미국과 멕시코의 경제력 차이로 인한 생활상의 극명한 대조를 고발하기 위해서라고 한다면, 어설픈 설명에 그칠 것이다. 빈부격차는 어디에나 존재하고, 국경도시를 경제적 관점에서만 바라보는 시선은 진부하다, 감독에게는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이다.     



앞의 질문을 살짝 바꿔보자. ‘후아레즈’와 ‘엘 패소’는 어떤 곳인가? 둘 다 멕시코와 미국이라는 법치주의 국가의 도시들로서 사회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법과 제도가 존재한다. 물론 어디까지나 원론적으로 그렇단 말이다. 이 지점에서 두 도시는 갈라진다. 후아레즈는 사회 안정을 목적으로 하는 제도가 유명무실한 곳, 멕시코 내에서도 손꼽히는 말 그대로 무법천지의 도시다. 거기에 감독은 ‘소노라’라는 카르텔 조직이 악명을 떨치고 있는 공간으로서 후아레즈를 묘사했다. 반면 ‘엘 패소’는 제도가 원론적인 기능에 맴돌지 않고 강력한 공권력과 부유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비교적 치안이 안정된 도시다. 물론 엄밀히 살펴보면 후아레즈에도 질서와 선이 존재할 것이고, 엘 패소에도 무질서와 악이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시카리오>에서 그려지는 후아레즈는 지옥굴에 다름없다. 후아레즈의 거리는 카르텔에 희생된 사람들이 나체로 전시되어있는 대형박물관처럼 보이고, 곳곳에서 들려오는 총성은 도시의 자동차 경적음처럼 빈번하다. 이른바 카르텔이 지배하는, ‘악’의 세계다. 엘 패소는 ‘악’의 세계를 정화하는 역할을 맡은 ‘세계경찰’ 미국을 표상하는 도시, 즉 ‘선’의 세계다. 감독은 국경도시에서 선악의 대립을 이끌어냈다.    

 

후아레즈와 엘 패소, ‘선’과 ‘악’을 상징하는 두 도시는 가느다란 국경을 사이에 두고 나뉘어져 있다. 언제든 악이 선을 침범할 수 있는, 긴장감이 팽배한 환경에 놓여있는 것이다. 물론 선이 악을 교화시킬 수도 있겠지만, 애초에 선과 악은 동등한 위계라고 볼 수 없다. <시카리오>에서는 카르텔 조직이 미국 본토 내에서도 범죄 행위를 저지르고 있고, 실제로 미국에서는 끊이지 않는 멕시코인 불법이민자 문제가 갖가지 논쟁을 촉발하고 있다. 그러한 점에서 볼 때 ‘선’은 언제나 ‘악’ 앞에서 무력하며, ‘악’을 품기는커녕 몰아내기에 바쁘다. 트럼프가 멕시코 장벽을 비롯해 불법 이민자에 대한 강경한 정책을 실시하려는 것은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사실 선악의 대립 역시 상투적이지만, 감독은 선악(두 도시)를 구분하는 그 경계(국경)가 얼마나 모호하고 무의미한 것인지에 대해 특기할만한 방식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그의 예리한 통찰력은 영화의 공간 구성에서부터 날이 서있다.     



2 ‘과 의 세계 안에서


거기서 그친다면, 감독은 관찰력이 뛰어난 사람 그 이상은 아닐 것이다. 감독은 후아레즈와 엘패소, 그 선악의 공간 속에서 다시 한 번 선악의 대립을 연상시키는 조직과 인물들을 배치해 다중적인 선악 구조의 세계, <시카리오>를 창조했다.      



<시카리오>의 줄거리를 간단히 설명하자면, 미국 본토, 피닉스에서 잔혹한 범죄를 저지른 마누엘 디아즈 조직과 관련된 사건을 파헤치는 것을 계기로 시작된다. 마누엘 디아즈는 ‘소노라’라는 카르텔 밑에서 일하는 수족으로, 케이트는 그 사건의 원죄격인 카르텔을 소탕하기 위해 만들어진 작전 팀에 합류한다. 하지만 ‘맷 그레이버’가 이끄는 작전 팀은 어디에 소속된 팀인지, 그 정체가 모호하다. 출신이 불분명한 요원들로 구성된 팀은 임무 수행 시에 지켜야 할 규범과 원칙들을 무시하고, 케이트에게 정확한 임무를 알려주지도 않는다. 케이트는 진실을 요구하지만, “넌 제복이 어울려”, “이게 미래가 되는 것”, “결국엔 당신도 이해하게 될 것” 등의 추상적이고 의미심장한 대답만이 돌아온다. 모든 의심쩍은 일들의 배경에는 ‘안드레하스’가 있다. 요원들 중에서 전투력이 가장 뛰어난 안드레하스는 ‘Medelin(메데린)’으로 불리던 전력이 있다. 메데린은 이전 멕시코에서 마약 거래를 관리하는 유일한 카르텔이었다. 소노라 카르텔에게 가족이 무참히 살해되고, 조직의 지위를 빼앗긴 일에 대한 복수를 위해 미국과 손을 잡았다. 미국은 애초에 원천 차단이 불가능한 마약 시장을 효율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그들이 말하는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안드레하스가 통제하는 카르텔 조직 하나만을 남겨두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들은 무법한 행위를 적법하게 만들기 위해 FBI 소속인 ‘케이트’가 필요했던 것이다.     


우리는 <시카리오>를 보면서 많은 의문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명백한 악으로 보이는 카르텔과, 그것에 대항하는 미국. 하지만 미국 역시 온전히 선하지 않다. 단지 카르텔보다 정도가 약한 ‘악’에 더 가깝다고 하는 것이 맞을 지도 모른다. 애초에 총이라는 살상 무기를 들고 누군가를 상대하는 누군가가 온전히 선할 수 있다는 생각도 대단한 착각이지만. ‘선한 것’처럼 보였던 케이트가 소속된 팀은 고속도로 한복판에서 카르텔의 하수인으로 의심되는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총살해버린다. 엘 패소에서는 신문이 발행되지 않는다는 비인간적인 이유로. 악의 제거를 목적으로 한다고 해서 어떤 행위든 정당화할 수 있는가. 케이트 팀은 목적이 선하다면 그 과정에서 생기는 치찰은 불가피한 것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케이트는 용인할 수가 없는 것이다.    

 


영화는 그때부터 삼중의 선악 구도로 다시 한 번 정립된다. 이제는 카르텔에 맞서는 작전 팀 ‘악’이 되고 케이트가 ‘선’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주인공 케이트는 <시카리오>속에서 철저히 무력한 캐릭터다. '악'을 '악'으로 갚고자 하는 그들의 행위를 막을 도리가 없다. 자신보다 훨씬 더 노련하고 강한 요원들 사이에서 케이트 절대적인 소수다. 케이트는 작전 중에 어이없게 들고 있던 기관총이 총에 맞아 불능상태가 되고, 심지어 자신이 경멸하는 안드레하스 덕분에 목숨을 보존하는 일까지 겪는다. 케이트의 행동 중 유일하게 주목할 만한 것은 이쯤에서 발을 빼자는 동료 요원의 말에도 끝까지 나아가는 것뿐이다. 이렇듯 ‘선’이 ‘악’에 기생하며, ‘악’에 짓눌리는 장면들은 주인공의 역할이 상당할 것이라는 관객들의 예상을 빗나간다. 단순히 영화적 반전이 아니다. 선악구도에서는 반드시 선이 승리한다는, 이상적임에도 보편적인 진리가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선’은 ‘악’에 비해 절대 소수일 수밖에 없으며, 연약하다는 것이 <시카리오>가 말하는 ‘악선’의 구도다. 

        

 

드뇌 빌뇌브가 이야기하는 방식


그의 영화 작법은 미니멀하다. 굳이 우리말로 표현하자면 ‘군더더기 없는 간결함’이라고 할 수 있겠다. 사건을 나열하는 방식으로 쌓아가면서, 전체적인 이야기를 완성하는 것은 사실 모든 영화의 구성 방식에 해당하지만, 그의 영화는 그 중에서도 아주 간단명료하다. 특히나 그 흔한 회상장면이나, 장면의 인위적인 배열 없이 시간순으로 구성했다. 명명백백함을 특징으로 하는 그의 작법은 사실 <시카리오>보다 키워드의 배열을 구성의 큰 틀로 사용한 <그을린 사랑>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하지만 그의 방식은 절대로 단순하지는 않은데, <시카리오>에서는 주인공 ‘케이트’의 역할이 그렇다. 그녀의 역할은 이야기에 다층적인 면을 부여하는 동시에 선악의 경계에 대해 더욱 깊게 설명하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인지 그의 영화는 감각적으로 읽히기 보다는 문법적으로 읽히는 경우에 가깝다. 영화 <위플래시>의 작법과 비슷한 측면이 있는데, 개인적인 견해지만 지인들과의 대화에서 <위플래시>가 거론될 때면, 필자는 종종 훌륭한 영화임에도 어떤 감명이 느껴지지 않는 영화라고 말하곤 한다. 한 개인이 최고의 경지에 다다르기 위한 투쟁의 과정이 완벽한 미쟝센을 통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는 것보다는, 그의 내면을 좀 더 깊게 보여줄 수 있는 감각적인 연출이 더욱 어울린다고 보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카리오>에 응고되어 있는 주제는 문법적인 연출과 완벽하게 맞아 떨어진다. 관객들은 영화를 보면서, 선악의 다층적인 구조를 하나씩 녹여가며 음미할 수 있다. 갈수록 심해지는 ‘선’의 무능과 ‘악’의 중압감에 짓눌린다. ‘선’을 표상하는 주체는 미국에서 작전 팀으로, 작전 팀에서 케이트로 점점 작아지는데 비해 ‘선’으로 보였던 미국과 작전 팀이 ‘악’과 동질화되면서 ‘악’의 세력은 더욱 커진다. ‘악선’의 대한 감독의 현실적인 인식은 <시카리오>에서 관객들에게 체계적으로 인식된다. 특히 후반부 땅굴에 침투하는 작전을 진행하는 장면에서, 야간 투시경 때문에 흑백으로 보이는 세상을 묘사한 장면에서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흑백논리의 세계 속에서는 총을 들고 누군가를 겨누고, 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그의 통찰을 너무나도 세련된 방식으로 표현했다.      


감독은 어디에나 존재하는 선악의 모호함, 무경계성을 집약하고 있는 아주 효과적인 공간을 찾아내는데 성공했고, 진부하리만큼 삶 곳곳에 산재한 선악구도의 일상성을 ‘카르텔과 미국’이라는 비(費)일상으로 표상했고, 그 비일상성을 다시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일상성으로 전환시키며 우리를 다시금 그 주제에 대해 고민할 수 있도록 인도해주는 역할을 했다. 그러니 관객들이 <시카리오>를 본다는 것은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와 주제에 대해 진지한 대화를 나누는 경험에 가깝다. 그렇게 관객들은 자연히 영화를 보면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게 되는 것이다.     


4 서로 속에 스며드는 빛과 어둠


선악의 구분 경계가 모호하다는 것은 전혀 새로운 사실도, 발견도 아니다. 온전한 선도, 악도 이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어쩌면 무엇도 온전하다고 말할 수는 없을 지도 모른다. 이분법적으로 결론내릴 수 없는 이러한 문제는, 바로 그런 본래적 특성 때문에 끊임없는 판단을 요구하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온전히 중요한 문제다. 드뇌 빌뇌브 감독은 상투하지만 중요한, 그 주제에 대해, 가령 국민들이 최순실·박근혜 게이트에 질려 다시 방관하고자 하는 태도에 대해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누군가는 항상 소리칠 필요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꼭 거창한 일은 아닐지언정, 우리는 사소한 일에서도 도덕적인 판단과 행동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한다. 

     

칸트는 ‘실재’라는 단어를 ‘대상’으로 대체했다. 우리는 인식할 수 있는 것만 인식할 수 있기 때문에, ‘실재’라는 개념은 칸트의 입장에서는 허구의 것들까지 포함하는 개념이었다. 우리가 ‘실재’한다고 생각하는 것들은 단순히 ‘대상’으로서 우리에게 인식된 것이고, ‘실재’는 그 너머에 있는 것까지 포괄한다는 것이다. 칸트는 자신 인식론을 세계에까지 확장해 세계 인식이란 인간이 이렇게도 파악하고 저렇게도 파악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어떤 세계를 규정해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듯 인간은 인식하는 것 너머의 무언가에 대해서 확실하게 말할 수 없는 존재다. ‘선’과 ‘악’ 역시 그렇다.      



칸트가 말한 ‘실재’와 ‘대상’ 개념의 정확한 범주까지는 알지 못하지만, 거기서 결론짓는다면 인간은 너무나 무기력한 존재에 그칠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인식할 수 없는 대상을 감각하고, 경험한다. 설령 환각일지언정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시대에서, 우리가 보편적으로 느끼는 것들이 분명히 실재하고 있다. 인간이 비록 ‘악’을 행하더라도, 인간은 ‘선’을 지향한다. 초월한 인간이 아닌 이상, 그 간극은 좁혀지지 않고 언제나 그 상태 그대로 유지된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악을 악으로 갚는 순환 고리는 끊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잔혹한 늑대들의 소굴에서 연약한 양(케이트)은 마지막 장면에서 자신에게 서명을 강요하고 돌아가는 안드레하스의 뒷통수에다 총을 겨눈다. 그를 죽인다고 해서 '악'이 소멸되는 것이 아니다. 분노는 악을 낳고, 악은 다시 악을 낳는다. 우리는 악의 딜레마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결국에는 총을 거둔 그녀의 행동이, 용기가 부족해서가 아닌 '선'에 대한 강한 의지였기를 바란다. 빛이 어둠을 이기는 것이 아니다. 어둠이 빛을 이기는 것도 아니다. 빛과 어둠은 매일마다 서로에게 스며들면서 낮과 밤을 만들어낸다. 그러니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어둠에 완전히 잠식되지 않고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힘쓰는 것뿐인지도 모른다.

매거진의 이전글 <I, Daniel Blake>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