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hyeon Feb 04. 2017

비애의 끝은, 단지 처절히 무력한 관조라는 사실 앞에서

<단지 세상의 끝>



단지 세상의 끝

자비에 돌란의 신작 <단지 세상의 끝>은 동명의 희곡이 원작이다. 원작과 같이 영화에는 5명의 인물이 등장한다.ㅡ피에르와, 루이의 통화상대를 제외하고.ㅡ 둘째 아들 ‘루이’, 첫째 아들 ‘앙투안’, 루이와 앙투완의 여동생 ‘쉬잔’, 앙투완의 아내 ‘카트린’, 루이, 앙투완, 쉬잔의 ‘어머니’다. 루이는 12년 전, 집과 가족을, 떠났고 유명한 극작가가 됐다. 그런데 그는, 곧, 죽는다. 어찌 된 일인지는 알 수 없지만. 30여 년의 짧았던 생의 끝에서, 그는 가족을 만나기 위해 집으로 돌아간다.      


    

그는 왜 떠나야만 했는가

<단지 세상의 끝>에서 분명한 건 루이가 12년 만에 집으로 돌아온다는 사실과, 어긋난 가족의 삶, 단편적인 기억뿐인 아버지의 부재 정도로 추릴 수 있다. 이 세 가지를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희미하다. 루이가 왜 집을 떠나야만 했는지, 가족의 불화는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인지 등, 서사의 여백이 상당하다. 영화를 보는 입장에서는 단지 추측할 뿐이다. 습관적으로 굳어진, 의미가 결여된, 서로에게 날카로운 그들의 대화 속에서, 그 뾰족한 일상 안에서 이명을 겪으며 침묵하고 있는 것에 다름없는 루이로부터 말이다.


아마 소통이 불가능한 그 상태는 적어도 12년 이상은 지속되어 온듯하다. 30대 중반의 루이가 12년 전에 집을 떠났으니, 독립할 수 있는 나이가 되자마자 떠난 것에 다름없다. 그전까지의 삶이 도대체 어땠기에, 그는 떠나야만 했는가. 허름한 판잣집에서 살았던 기억과, 아버지의 부재와, 자신의 성 정체성에 대한 고민과, 가족의 불화 속 막막함. 모든 절망이 혼재한 삶에서 그가 느꼈을 비애를 생각한다. ‘말’이 아닌 두세 마디의 ‘대답’만으로도 벅차,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무엇이라도 하는 것보다 나은 상황에서 느꼈을 무력감을 생각한다.     


그렇게 비애감은 루이 스스로를 무력한 존재로 전락시켰을 것이다. 가능성이 충분한 그의 삶에, 체념을 안겨다 줬을 것이다. 그는 두려웠을 것이다. 자신의 미래가, 그리고 자신의 과거가. 그렇게 그는 모든 것을 외면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눈을 감고, 귀를 닫으며, 자신이 떠날 수 있게 될 그날까지 함구했을 것이다. ‘카프카’의 표현을 빌리자면 루이는 자신이 돌이킬 수 없을 만큼 훼손되기 전에, 가족을 떠났을 것이다. 지금보다는 더 나은 불행을 바라며 말이다. 그는 소리 없이 항변한 것이다. 비애의 끝에서, 루이는 단지 처절히 무력한 관조에 닿았다.



그는 왜 돌아가야만 했는가

12년이 지나서야 루이가 집으로 돌아간 이유는, 곧 죽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태껏 그래 왔던 것처럼 짧은 말들이 적힌 우편으로 자신의 죽음을 전할 수도 있었고, 좀 더 성의를 표해 통화를 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루이는 집으로 돌아가 가족들과 대면한다. ‘죽음’은 가족들에 대한 루이의 ‘사랑’을 상기시키는 표면적인 이유다. 루이의 회귀의 본질은 ‘사랑’이다. 하지만 그 사랑은 우리가 보통때 말하는 사랑이 아니고, 모두가 이해할 있는 사랑도 아니다. 애증도 아니다. 미워해도 뗄 수 없는 어떤 가족이라는 고리에서 느껴지는 중압감에 가깝다. 나는 그걸 설명하지 못하겠지만, 분명하게 느낀다. 그런 루이의 사랑은, 첫 독백에서부터 선명하다. 아무리 오롯해보이는 사람일지언정, 스스로의 삶에 온전한 주체일 수 없다. 고립으로부터 도피했지만, 벗어날 수 없었을 루이는, 그래서 마냥 행복할 수 없었을 그는, 생의 끝에서 그들에 대한 기억을, 환상과도 같은 그 기억을 더듬는다.

   

(영화의 대사와 같은 지는 기억이 희미하지만, 번역된 희곡의 독백을 옮긴다.)


난 그들을 보러 가기로, 내가 걸어온 길을 되돌아, 내 삶의 흔적이 있었던 곳으로 가기로, 

그래서 여행을 하기로 결심했다.     


천천히, 조심스럽게, 조심스럽게 그리고 구체적으로 그들한테 알리기 위해서다. 

    

그리고 아직 결정할 수 있다는 걸 보여 주기 위해, 스스로에게, 다른 사람들에게, 그리고 그들에게,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너, 너희, 그녀, 내가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너무 늦었을까, 그래도 할 수 없지) 

스스로에게, 다른 사람들에게 마지막으로 내가 나 자신에게 책임이 있고, 

극단적으로는 내가 내 삶의 주인이라는 환상을 보여 주기 위해서다.   

  

하지만, 변한 것은 없어 보인다. 가족들은 문 앞에서부터 아들을, 오빠를, 동생을 반기며 타인에 가까웠던 12년의 세월을 무색하게 만들지만 이내 루이에 대한 원망을 감추지 않는다. 앙투완은 성공한 루이에 대한 자격지심을 넘어, 자신에게 떠민 책임감에 대한 원망과 그로인해 이제껏 느껴왔을 중압감 탓에. 어머니는 루이가 아들로서의 책임과 도리를 저버린 탓에. 쉬잔은 오빠인 루이가 자신에게 철저한 타인처럼 느껴지는 것이 원망스럽다. 12년의 세월 앞에, 많은 것들이 아득해졌겠지만 극에 달했던 감정의 잔상은 결코 지워지지 않는다. 그러니 루이의 가족들은 모호하고 시답잖은 말들로 서로를 할퀼 뿐이다. 잘해 보려고 해도, 다시 시작해보려고 해도, 뜻하지 않은 말들만이 튀어나온다. 서로를 향한 비명으로 가득 찬 가족이라는 족쇄 속에서 루이와 소통이 가능한 사람은 외부인인 카트린 뿐이다. 혈연관계에 묶이지 않은 카트린만이 루이처럼 다른 가족들을 관조한다.     


그렇지만 루이에 대한 가족들의 원망 역시 온당하다. 루이는 그들을 떠났고, 기껏해야 기념일에 짧은 엽서를 보내면서 위안을 얻었다. 12년간의 절연은 가족들을 어두운 심연의 끝으로 밀어 넣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가족들은 루이가 돌아온다는 소식에 다시 한자리에 모였다. 루이가 안겨준 절망에도 꿋꿋이 버텼다. 단지, 그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럴 수 있었다. 그러니, 루이는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절대 만회할 수 없는, 혹은 어떠한 방법으로도 돌이킬 수 없을지도 모르는 일을 저지른 것이나 마찬가지다. 루이는 가족들을 포기했었다.     



그는 왜 다시 떠나야만 했는가

결국 12년 만의 재회 역시, 파국으로 치닫는다. 이제와서 가족들에게 다가가려는 루이의 행동은 앙투완에게는 끝내 가식이 되고 만다. 루이가 자신들을 연민하고, 동정한다고 생각한다. 분노를 참지 못한 앙투완은 루이를 집에서 내몬다. 루이는 그제야 절감한다. 자신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 존재인지를, 또 그들에게 솔직하지 못했는가를. 언제나 자신만을 앞세워 왔는지를. 루이는 앙투완이 쏟아내는 말에 대꾸조차 할 수 없다. 고개를 끄덕이며, 앙투완의 말에 따를 수밖에 없다.


앙투완은 밖으로 나가버리고, 어머니는 슬픈 키스와 함께 “다음번엔 더 준비해서 맞아줄게”라는 말을 끝으로 앙투완을 따라 나간다. 쉬잔은 “오빠 보러 가도 되는 거지”라는 절박한 물음을 내지르며 자신의 방으로 숨는다. 이제 집 안에는 루이와 카트린만 남았다. 외부인으로 여겨지는 그들만이 남은 집이라는 내부 속에서, 루이는 눈은 허망하다. 루이의 목덜미는 땀에 젖었다. 


갑자기 새 한 마리가 집안의 온 벽에 사방으로 부딪치며 바닥으로 쓰러진다. 가쁘게 숨을 몰아쉬던 새는 곧 숨이 멎는다. 그렇게 루이는 다시 집을 떠난다. 언젠가 자신들의 가족처럼 소리칠 수 있기를 바라면서. 만신창이가 되더라도 집으로 돌아와 눈을 감을 수 있기를 희망하면서. 작가가 된 루이를 제외한 가족들이 루이의 앞에서 그랬던 것처럼, 그 역시 가족들에게 수없이 말을 더듬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하고 다시 말하면서, 그들을 포기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하늘과 땅이 맞닿아 있는 밤,

홀로 걷고 있다.

내가 생각하는 건

(바로 이게 내가 말하고 싶었던 거다)

크고 멋진 소리,

계곡에 울려 퍼지도록 환희에 찬 긴 함성을 질러야겠다고,

나한테 선사해도 될 그런 행복,

힘껏 한 번 소리쳐 보는 것,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렇게 하지 않았다.

자갈 위에서 내 발소리와 함께 난 다시 길을 떠난다. 


자비에 돌란에 대해

자비에 돌란의 영화는 설명하지 않는다. 애초에 자비에 돌란이 다루는 건 어떤 감정들이다. 어떤 건 너무 복잡해서 따지고 보면 말이 되지 않을 정도로 모순적이다. 무수한 설명을 돌고 돌아야 겨우 설명이 되는 감정들이 있다. 아무리 단순해보여도 따져보면 모든 감정은 깊다. 깊지 않은 감정들은 그저 순간의 기분에 지나지 않으니까. <아이 킬드 마이 마더>와 <마미>에서는 <단지 세상의 끝>처럼 미워하는 동시에 사랑할 수밖에 없는 가족에게 느끼는 모순을, <탐엣더팜>에서는 사랑하는 이의 부재와 이를 채우는 허구에서 느껴지는 공허함을, <로렌스 애니웨이>에서는 꿈꾸던 삶을, 자유를 위한 용기를 담았다. <단지 세상의 끝>은 가족이라는 공동체 안에서 비애가 주는 무력감과, 그 끝에서 느끼는 처절한 관조에 대해 말한다. 돌란은 영화에서 한 감정을 집요하게 파고 드는  것으로 시작해, 극으로 끌어올린 감정을 끝내 터뜨려 버린다. 

    

바로 그 점이, 뮤직비디오 같다는 평에 닿아있을 것이다. (다만, 종종 뮤직비디오 같다는 평은, 그의 영화를 비꼬기 위해 사용된다는 점에서, 그들이 생각하는 ‘뮤직비디오’란 도대체 어떤 것이기에, 그것을 비하의 의미로 사용할 수 있는지 의문스럽다.) 바로 그 점이, 내가 자비에 돌란에게 끌리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다. 스타일링, 연출, 감독, 연기 등 폭넓은 그의 재능 속에서도 음악에 대한 감각은 특히나 더할 나위 없다. 극에 달한 감정들은 형언할 수 없으니 받아들이는 것만으로도 벅차다. 절제하지 않고, 설명하려 하지 않고, 그저 담아낼 수 있는 만큼 담아내는 것도 감정을 충만하게 전달할 수 있는 한 방법이다. 자비에 돌란은 그 방법을 다시, 뮤직비디오처럼 느껴지는 장면들을 통해 표현한다. 나는 <마미>에서 ‘Expreience’ 음악이 사용된 장면을 아직도 가끔 찾아본다.    

 

그래서 <단지 세상의 끝>에서 자비에 돌란의 절제가 아쉬웠다. 맥락에 따라 조금은 물러설 필요가 있었겠지만, 가장 중요한 루이의 감정에서 끝없이 분출하는 무엇이 느껴지지 않았다. 아무리 침잠하는 감정이라도 극에 달하면 폭발적이긴 매한가지니까.      


마지막으로, 자비에 돌란의 영화는 자전적으로 느껴진다는 점에서, 씁쓸하다. 어디까지가 실제고, 어디까지가 허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리 많은 인터뷰를 봐도 알 수 없겠지만. 많이 외로웠을 사람임에는 분명하다. 원작이 된 희곡에서는 사실 루이가 장남이고 앙투완이 동생이다. 매순간 그에게 극복을 요했을 가족이라는 관계 속에서, 그는 어린 시절을 어떻게 기억할까. 감정을 폭발적으로 분출하는 자비에 돌란의 영화가 시원한 동시에 가끔은 시릴 정도로 아린 이유다.

매거진의 이전글 <시카리오 : 암살자의 도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