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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yeon Mar 28. 2017

<러덜리스>,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

감당이 불가능한 아픔을 받아들이는 법에 관하여.


영화『러덜리스』를 간단히 정리하자면 이렇다. 매닝은 캠퍼스 총기살인사건으로 아들 조쉬를 잃었다. 매닝은 조쉬의 죽음 이후 집도 없이 은거를 시작한다. 그러다 우연히 동네 라이브 바에서 조쉬의 음악을 연주한 것을 계기로, 조쉬의 또래인 쿠엔틴을 만나 밴드 활동을 시작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밴드에서 매닝은 아들과 함께 만들었던 음악을 통해 상실의 아픔을 극복한다.     


다만 충격적인 것은 조쉬가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라는 점이다. 처음 이 영화를 봤을 때, 그 사실이 그저 충격적이기만 했다. 당연히 피해자라고 생각했는데. 그리고 그런 아들을 사랑하는 마음을, 그러니까 살인자를 사랑하는 마음을 부정할 수 없는 한 아버지의 지극한 마음에 가슴이 아팠다.      


근데 그 뿐이었다. 나에게 조쉬는 여전히 ‘살인자’였다. 조쉬의 삶이 어땠는지, 이제껏 무엇을 하며 살아왔든 간에 그저 ‘살인자’였다. 조쉬의 모든 정체성은 살인자라는 세 글자 속에 모두 빨려 들어갔다. 나는 무엇이 어찌 됐든, 조쉬가 살인이라는 선택을 한 순간, 자신의 삶을 포기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어떤 비난도 감수해야함이 마땅하다고, 절대로 용서받을 수 없을 것이라고 냉정히 결론지었다. 그리고 그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판단처럼 여겨졌다. 그래서 『러덜리스』를 단순히 어떤 부정父情에 관한 영화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얼마 전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라는 책을 읽게 되었다. 콜럼바인 총기사건의 범인 2명 중 하나인 ‘딜런’의 엄마 ‘수’가 ‘딜런’의 동기를 이해하고자, 그리고 아들의 죽음이라는 상실과 마주하는 방법으로서 쓴 책이다. 나는 에세이처럼 읽었지만 사회과학으로 분류될 만큼, 범죄심리학과 우울증에 관한 수의 깊고, 힘겨운 연구들이 담겨있다. 책에 관한 설명은 소개글로 대신한다.     


1999년 4월, 미국 콜럼바인고등학교의 졸업반 학생 두 명이 특별한 이유 없이 학교에서 총기를 난사해 같은 학교 학생과 교사 13명을 죽이고 24명에게 부상을 입힌 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는 사건 발생 17년 후 가해자 중 한 명인 딜런 클리볼드의 엄마 수 클리볼드가 쓴 책으로, 딜런 클리볼드가 태어나서 사건을 벌이기까지의 17년, 또 사건 발생 후 17년, 총 34년간의 일을 정리하고 있다. 사건의 발생 이유, 사건을 벌인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중심으로 가해자 가족들이 겪은 생각과 감정들이 솔직하게 정리되어 있다.     


책은 아들의 명예회복을 위한 것이 아닌,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인간의 근원적인 폭력성과 마주한 인간이 그것을 이해하고 설명하고 또 예방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쓴 책이다. 인간의 폭력성에 대해 적당한 거리를 두고 차갑게 고발하는 여타의 책과 달리, 바탕에 부정할 수 없는 ‘사랑’을 깔고 있는 ‘어머니’가 써내려간 글이라는 점에서 대단히 독특하고 설득력 있다.     


수는 조심스럽게, 정말 조심스럽게 말한다. 자신의 아들 딜런이 그런 끔찍한 학살을 저지르게 된 일에는 자신의 책임이 없을 수는 없겠지만, 자신은 최선을 다해 아들을 키웠다고. 딜런이 학살을 저지르기 직전까지도, 아니 저지르고 난 후에도 스스로를 좋은 엄마라고 생각했다고. 매닝의 전처이자 조쉬의 엄마도 극 중에서 같은 말을 한다. 수는 변명의 의도를 배제하고, 딜런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좋은 평판을 들어왔음을 강조했다. 아들의 죽음을 객관화하고, 연구하려고 마음먹기까지, 또 연구를 하면서 ‘엄마’는 얼마나 굳은 결심이 필요했을까. 책장을 넘기는 내 손이 부끄러웠다.   


  

책을 읽다보니 조쉬와 딜런은 여러모로 참 닮아 있었다. 부모에게 속을 내색하지 않는 성격이나 원활했던 인간관계,ㅡ조쉬에게는 여자친구가, 딜런에게는 프롬에서 만난 파트너가 있을 정도였다.ㅡ 특출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어떤 방면에 소질을 보여 부모를 기대하게 만드는 아이. 사실 나도 마찬가지다. 따져보면 모두와 닮았을 것이다. 누군들 자신과 닮지 않았다고 할 수 있을까. 결국 조쉬와 딜런도 평범한 인간이었을 뿐이다.     


하지만 총기 살인과 같은 학살을 저지른 이를 평범하다고는 또, 할 수 없다. 그들과 우리는 무엇 때문에 그렇게 달라졌을까. 조쉬의 동기는 알 수 없지만, 수가 말하는 딜런의 동기는 우울증이다. 허나, 우울증이 있다고 해서 아무나 살인을 저지르지는 않는다. 딜런 역시 그랬다. 사건 직전에 쓴 일기에서도 딜런은 에릭과 함께 범행을 계획하고는 있었지만, 실행에 옮기기 전에 자신은 자살할 것이라고 썼다. 그러나 딜런은 범행을 저지르고 결국 현장에서 자살했다. 자살까지 생각하는 우울증 상태. 엄밀히 말해 (자신을 포함한) 살인이 가능한 상태의 우울증일 때,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어떤 전문가는 내향적인 성격의 딜런이 상처를 받아 심신이 미약해진 상태에서 공격성향이 강한 에릭에 의해 수동적으로 범행을 저질렀을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수는 다른 결과를 밝힌다. 임상심리학자이며 콜럼바인 수사 때 FBI 조사반 자문이었던 드웨인 퓨질리어 박사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에릭이 사람을 죽이러 학교에 갔고 그러다 자기가 죽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한 반면, 딜런은 죽으러 학교에 갔고 그러다 다른 사람도 같이 죽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수는 딜런의 원인은 수동성이 아니라, 어떤 우울증의 극단에서 끝내 판단이 흐려졌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아마 합리화하려는 의도처럼 보일 수 있다는 사실을 경계한 듯하다. 그러나 에릭이 없었다면 딜런이 살인을 저지르지 않을 가능성이 커 보이는 상황에서 에릭의 영향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딜런이든 조쉬든 에릭이든, 정상적인 행동 범주에서 벗어났고 어떻게 그렇게까지 극악무도한 상태에 이르렀는지에 대한 고민은 솔직히 무의미한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들은 명확한 의도를 가지고 살인 행위를 저질렀기 때문에 ‘악의 평범성’으로도 설명하기에도 부적절한 사례 같다. 테러 행위와도 구별된다. 게다가 그들은 자신의 악마적 범행에 대한 계획도 숨기려면 얼마든지 숨길 수 있는 것임을 보여줬다. 수는 ‘징후’라고 할 만한 것들이 있긴 했지만, 또래 남자 아이들에게 흔하게 나타나는 행동이었고, 그것을 통해 학살을 예감하는 것을 불가능에 가까웠다고 말한다. 조쉬도 마찬가지였다. 사건 당일 날 아빠와의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전화를 받지도 않았지만, 매닝은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그래서 수는 현재 뇌건강 문제에 관심을 갖고 우울증으로 인한 자살을 예방하기 위한 활동에 전념하고 있다고 밝힌다. 그녀가 책에 인용한 구절이다. "가슴속에 풀리지 않는 채로 있는 것에 대해 인내심을 가지라. 그 질문을 잠긴 방이나 외국어로 쓰인 책처럼 여기고 그 자체로 사랑하려고 애쓰라. 답을 찾으려고 애쓰지 말라. 그 답은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에 지금 주어지지 않는 것이다. 모든 것을 경험하는 게 관건이다. 지금은 그 질문을 살아야 한다. 그러다 보면 어느 먼 날에, 점차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 답을 경험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매닝 역시 그렇다. 몇 년 동안이나 아들을, 아들이 저지른 사건을 마주하지 않기 위해, 자신과 상관없는 일로 치부하려고 했지만 결국 그럴 수 없었다. 결국 그가 할 수 있었던 건 그저 아들과 함께했던 추억을 곱씹으며 사는 것이었다. 아들의 음악을 노래하고, 아들이 어디선가 함께 노래를 불러주기를 바라는 것.     


많은 이들이 이 책을 부모가 꼭 읽어야 하는 책이라며 또 다시 많은 사람들에게 추천하지만, 부모가 아닌 자식 된 입장에서 이 책을 덮은 후 나는 어떤 생각이 드는가, 머릿속을 정리해봤다. 나는 우연히 피해자가 됐을 수도 있고, 그들의 친구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나도 딜런이나 조쉬가 끔찍한 범죄를 저지를 수 있는 바탕이 된 우울감과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역시 유난스럽지 않을 정도의 우울감을 품고 살아가고 있으며, 그렇게 살아오기도 했다. 책에 담겨있던 딜런의 일기 속 내용, 조쉬의 히스테리적 행동들은 스스로도 경험한 일들이었다. 자살을 할 생각은 없지만 자살에 대해서는 꽤 많이 생각해봤고, 나는 칸트와 비슷한 방식으로 자살을 정의내린 것 같다.     


어떤 면에서 자살은 비열하다고는 할 수 없어도, 적어도 안이한 해결 방식임에 틀림없다. 나는 내가 내 자신을 죽일 수 있음을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나를 파괴하는 것으로부터 아주 풍요로운 원천을 발견한다. 그러나 물론 이것은 내가 자살하지 않을 때에만 유효한 것이다.     


사실, 내가 누군지 밝히지 않고 쓰는 글에서도 이런 말을 하기가 쉬운 것은 아니었다. ‘자살’이 남들에게 어떻게 비춰지는지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고, 독실한 기독교인 어머니를 두고 있기도 하고, 나 역시 기독교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단순히 잘못된 일로 규정하고 가림막을 쳐버린다면, 많은 이들이 스스로의 감정에 혼란을 느낄 수밖에 없다. 담담히 대면할 줄 아는 행동이 결과적으로 나을 수 있다. 


지금은 수많은 사람들이 우울증을 만성질환처럼 여기며 산다. 부끄러울 일이 아님을 알면서도 부끄러워하게 되는 것은. 인식의 문제가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다는 반증이다. 그렇기에 ‘정신병’으로 치부되던 것들에, 조금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그것을 ‘뇌건강’이라는 용어로 더 많은 사람들에게 다가가려고 시도하는 수의 행동이 참으로 용감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의 문제. 이토록 잔혹한 범죄에서 과연 가해자는 용서받을 수 있는가. 조쉬의 엄마도 그랬고, 수도 그랬듯 몇몇의 피해자 부모들은 조쉬와 딜런을 용서한다고, 자신들은 아픔을 받아들였다고 말했다. 자신이 가해자의 엄마가 아니었다면 남들처럼 가해자 부모를 비판했을 것이라는 수는 놀랍게도 자신이 가해자의 엄마임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위로를 받을 수 있어 놀랬다고 말했다. 누구는 용서할 수도 있지만, 누구는 절대로 용서하지 못하는 일이다. 『러덜리스』에는 락카로 더럽혀진 조쉬의 비석을 부부가 함께 닦는 모습이 나오기도 한다. 누구는 관대하고, 누구는 관대하지 못한 문제로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다. 용서하는 삶과 용서하지 못하는 삶은 어떻게 다를까.     


누군가는 말했다. 용서란 진정한 참회가 전제되어야만 가능한 일이라고. 딜런은 현장에서 자살했다. 딜런의 자살을 참회로 보기는 힘들지도 모른다. 딜런에게는 그저 삶이 무의미했고, 정말로 다른 사람의 삶까지도 무의미한 것으로 봤을 수도 있다. 하지만 범행 도중 4명을 살려줬다는 그의 행동은 주목할 만하다. 하지만 그 역시도 그저 연민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결국 모든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는 어떤 ‘동기’나 ‘참회’의 흔적들 모두 용서의 근거가 되기엔 불충분한 것 같다. 용서란 가해자를 위한 것이 아닌지도 모른다. 단지 피해자가 자신의 상처를 받아들이는 한 가지 방식에 불과한지도 모르겠다.      


더 이상 덧붙일 말이 없다. 콜럼바인이나 버지니아테크, 샌디훅 같은 참사가 일어났을 떄 사람들이 가장 먼저 던지는 질문은 '왜?'이다. 이 질문은 잘못된 질문일 수 있다. 나는 '어떻게?'라고 묻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하게 되었다.어떤 일이 왜 일어났는지 설명하다 보면 실행에 옮길 수 있는 해결책 없이 단순한 해답에 안주하고 만다. 이미 고통에 시달리고 있고 자살에 대한 취약성이 있는 사람만이 죽음을 삶의 고통을 끝낼 논리적 해결책으로 떠올린다. 사실 수가 하고 있는 것이 정답이다. 제 2의, 제 3의 딜런을 예방하는 것. 용서할 일을 최소한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최선이다. 피해자, 가해자 구분이 없는 최선의 방법이다.      


딱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었는데 에릭에 대해서는 알 수 있는 것들이 많이 없다는 사실이다. 그 역시 어떤 동기와 생각이 있었을 텐데. 무슨 이유가 있었는지도 모르겠지만 에릭을 다루는 방식이 기존의 관점과 별로 다르지 않게 느껴졌다. 허나, 다만 읽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한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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