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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yeon Apr 14. 2017

<송곳니>

도달 불가능한 것으로서의 자유

아무리 자유롭다고 해도 인간은 필연적으로 어딘가에 매여 있는 존재다. 구속의 상태를 인정할 수밖에 없음에도 인간은 때때로 자유를 추구한다. 허망한 시도다. 진정한(혹은 절대적) 자유는 모든 관계를 초월해야하기 때문이다. 구속물의 존재가 완전히 무無인 상태에서만 가능하다. 결국 자유를 느낄 수 있는 존재마저 사라진 공空의 세계에서 가능한 이야기다. 그러므로 자유라는 것은 애초에 도달 불가능한 공허한 무엇이다. (사후세계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가정하고) ‘진정한 자유는 죽음으로써 얻어진다.’라는 말이 괜히 생긴 것이 아니다. 닿을 수 없으면 환상이 되듯, 획득이 불가능한 자유는 누구나의 어떤 시기에는 동경의 대상이다. 도달할 수 없음을 알면서도 쉽게 포기할 수 없는 것이 무엇이다. 그래서 우리는 때때로 완전한 고립을 원한다. 완전한 고립은 완전한 해방, 즉 자유와 같다고 착각하기 쉽기 때문이다. 어떤 것에도 구애받지 않는(심지어 자기 자신까지도) 이 ‘자유’라는 것은 어떤 것과도 관계 맺지 않는 고립과 분명히 닮긴 했다. 하지만 아무리 떨쳐내고, 끊어내도 고립의 인식 주체인 ‘나’라는 존재까지 없앨 수는 없다. 그렇기에 고립은 어디까지나, 제약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상태이며 완전한 고립 역시 완전한 자유와 마찬가지의 이유로 불가능하다. 자유와 고립, 이 두 가지를 혼동하는 인간의 모습이 바로 영화 『송곳니(Dogtooth)』다.



『송곳니』의 등장인물인 5명의 가족(아빠, 엄마, 두 명의 딸, 아들)은 모두 이름이 없으며, 그들의 생활반경은 교외 지역에 위치한 집과 마당에 한정되어 있다. 그마저도 집은 높은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문은 닫혀 있다. 갇힌 것이 아니다. 가족들 중 유일하게 아빠는 바깥 세계를 드나든다. 즉, 바깥 세계가 폭력적이라는 인식은 가족 모두에게 공통적이지만, 부모와 자식으로 양분된 관계에서 그들의 세계 인식 과정은 전혀 동등하지 않다. 그들은 바깥 세계의 폭력성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롭고자 스스로를, 자식들을 고립시킨 것이다. 아빠가 바깥 세계를 드나드는 이유는 최소한의 생계를 위한, 위험으로부터 가족들을 지키기 위한 필연적 선택인 듯 보인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 영화가 독재에 대한 우화라는 점에 그다지 동의하지 않는다.) 요컨대 부모는 바깥 세계의 폭력성을 직접 경험했지만 자식들은 부모의 경험을 통해 간접적으로 부정적 인식을 주입받았을 뿐이다. 이때부터 부모는 역설적으로 자식들의 자유를 억압하는 자로서, 자식은 억압받는 자로서의 대결 구도가 만들어진다.



간접적 인식은 확신이 되기 힘들다. 이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부모는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아내와는 어떤 사고 이후 암묵적 합의가 있었던 것 같다.) 그 중 가장 영향력이 큰 것은 왜곡된 언어를 통한 보강이다. 가령 ‘좀비’는 ‘작은 노란 꽃’이라는 식으로 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언어라는 원천적 수단을 필수적인 의사소통만을 위한 도구로 전락시키는 것이다. 또한 집을 나간 장남을 고양이가 죽였다는 거짓말을 하며 자식들을 위협하기도 한다. 결국 자식들은 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당한 채 부모가 만들어 낸 좁은 세계의 질서에 동화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딸이 바비 인형의 ‘발’을 자르는 장면과 아들이 마당에 들어온 고양이를 죽이는 것이 바로 이러한 인식과 관계한다.  



허나 인간은 모든 것에 호기심을 가진다. 세계가 아무리 두렵다고 한들, ‘앎’에 대한 욕구를 억압할 수 없다. 결국, 끝에는 구속으로부터의 자유를 원한다. 반면 부모는 그들만의 질서를 더욱 촘촘히 하려 애쓴다. 일종의 상벌점제를 만들어 자식들의 행동을 통제하는 동시에 장난감 등을 주면서 최소한의 호기심을 채워준다. 아들의 경우, 성욕 해소를 위해 크리스티나라는 외부인을 끌어 들이는데, 그녀의 본래 직업은 ‘security’, 즉 보안관이라는 점은 영화를 아우르는 역설의 표상이다. 부모는 크리스티나를 자신들 세계의 질서를 유지하는데 이용하려 했지만, 크리스티나는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바깥 세계의 것들을 그들의 세계에 끌어 들인다. 결국 부모가 의도했던 ‘안전’과는 반대로, 자식들의 호기심을 더욱 부추기도록 역할한다. 결국 외부인의 출입을 금하기로 한 부모는 아들의 성욕 해소를 위해 근친상간까지 용납한다.



부모는 보다 근본적인 방법의 필요성을 느꼈을 것이다. 그들은 자식들에게 막연한 희망을 심는다. 송곳니가 빠지고, 혼자 운전을 해서 밖으로 나갈 수 있을 때, 비로소 바깥 세계로 나갈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부러지지 않는 이상, 송곳니는 빠지지 않는다. 송곳니의 은유는 부모가 훈련소에 맡긴 사냥개와 관계한다. 송곳니는 영어로 dogtooth, 훈련받은 개처럼 집을 지키기를, 자신들이 만들어낸 세계를 보호하기를 요구하는 것에 다름없다. 눈을 가리고 소리를 통해 엄마를 찾는 ‘놀이’는 같은 맥락의 훈련이다. 자식들의 인식의 범위를 제한해 원하는 상태에 고착시키고자 한 것이다. 부모는 자식들의 운명을 바깥 세계에 대한 영원한 경계자라는 숙명으로 환원시켰다.



하지만 인간에게는 초월적인 능력이 없다. 큰 딸은 결국 자유의 욕망을 자제하지 못하고 아령으로 자신의 송곳니를 부순다. 큰 딸은 이때 처음으로 웃었다. 그리고 아빠의 자동차 트렁크에 들어가 문을 닫는다. 스스로 송곳니를 부수는 데까지는 성공했지만,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는 방법은 스스로 깨우칠 수 없었다. 트렁크 문은 안에서 열 수 없다. 큰 딸은 바깥 세계로 나가는 통로에 스스로를 가둬버린 것이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알지도 못한 채 트렁크 안에서 피를 흘리며 웅크리고 있을 것이다. 트렁크의 문은 영화가 끝날 때까지 열리지 않는다.



자유를 희생하고서라도 폭력성의 세계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것, 폭력의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자유를 얻는 것. 영화는 둘 중 무엇이 더 나은 것인가에 관한 가치판단을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니다. 본질적으로 어떤 것도 선택 불가능하다는 딜레마를 다루고 있다. (인간이 폭력적이라는 뜻은 아니지만) 인간은 어느 정도의 폭력성을 내재하고 있는 듯 하다. 부모가 자식들을 훈육하는 방식이 근본적으로 폭력적이라는 점에서 시작해 아들이 마당에 들어 온 고양이를 칼로 후벼 파는 것이나(아무리 위협적 존재로 인식했다고 한들), 비행기 장난감 때문에 큰 딸이 아들의 팔을 칼로 벤 것들을 보라. 인간이 구성원으로서 존재하는 세계는 폭력성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결국 부모가 만들어 낸 것은 완전한 고립에도 도달하지 못한 상태의 기괴한 세계였을 뿐, 자유와는 거리가 멀었다. 큰 딸 역시, 자유를 추구했지만 경계 속에 갇혔다. 결국 자유를 향한 인간의 투쟁은 영화의 첫 시작인 ‘오래 버티기’ 게임과 다를 바 없다. 승자와 패자가 존재하는 게임처럼 우리의 인생을 이분할 수 없다. 그저 마취 게임을 하듯 인정하고 버텨내는 것이 인생의 본질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손가락을 뜨거운 물에 아무리 오래 대고 있을 수 있다고 한들, 손가락은 괴사될 뿐이라고, 감독은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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