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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yeon May 12. 2017

다르덴 형제의 영화들
<로제타>에서 <로나의 침묵>까지

동기(動機)적 윤리성을 담보하는 리얼리즘의 진수


갑자기 다르덴 형제의 영화에 관한 글을 쓰기로 마음먹은 것은, 얼마 전에 친구와 나눈 대화 때문이다. 한창 대화 중, 친구는 지나가는 소리로 자신이 듣고 있는 수업에서 영화는 예술이 아니라는 한 교수님 생각을 나에게 전했다. 물론 예술로서의 영화의 지위에 관한 논란이 많은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예술이 아니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는 생각에서, 한편으로는 가장 애착을 느끼는 영화라는 장르를 수호하고자하는 치기에서 이 글을 쓴다. 나는 예술이 무엇인지 모른다. 다만, 내가 생각하는 예술의 한 가지 정의는 예술의 모습으로 제시된 현실을 끝까지 탐구하고자 하는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점에서 다르덴 영화는 내게 예술로서 부족하지 않다.



네 개의 눈을 가진 사람

다르덴 형제라고 불리는 장 피에르 다르덴(형), 뤽 다르덴(동생)은 벨기에 동부 리에주에 위치한 세랭 태생이다. 드라마를 전공한 형과 철학을 전공한 동생은 극작가 겸 영화감독인 아르망 가티의 문하에서 공부한 뒤, <레옹 M의 보트가 처음으로 뫼즈 강을 내려갈 때>와 같은 다큐멘터리를 만들기 시작했는데. 주로 노동자들을 다룬 작품이었다. 스스로를 ‘네 개의 눈을 가진 사람’이라고 부르는 다르덴 형제가 노동자들의 삶에 관심을 가지게 된 이유는 지역적 특성과 무관하지 않다. 오히려 자연스럽다고 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 다르덴 형제의 고향인 세랭은 철강 산업 도시로서의 명성을 잃고 직업을 잃은 노동력 20퍼센트가 빠져나간 도시이기 때문이다. 세랭에서 나고 자란 다르덴 형제에게 ‘빈곤’과 ‘실업’의 문제는 일상적인 무엇이었을 것이다. 



다큐멘터리에 매진하던 다르덴 형제가 처음으로 만든 극영화는 1986년 작 <거짓>으로 이후 <약속>(1996), <로제타>(1999>, <아들>(2002), <더 차일드>(2005), <로나의 침묵>(2008>, <자전거 탄 소년>(2011), <내일을 위한 시간>(2014), <언노운 걸>(2016)으로 이어진다. 그들의 영화는 <약속>으로 국제적인 평단의 주목을 받은 뒤, <로제타>와 <더 차일드>로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해 세계적인 거장으로 인정받게 된다. 각종 평론과 논문에 따르면 다르덴 형제의 영화는 <자전거 탄 소년>을 기점으로 (단언하기엔 이르지만)전기와 후기로 나눠지는 것처럼 보인다. <자전거 탄 소년>에서는 처음으로 ‘희망’의 존재가 영화 속에서 드러나며, <내일을 위한 시간>에서는 이제껏 비전문 배우를 고용했던 것과 달리 유명 배우(마리옹 꼬띠아르)를 캐스팅하는 등 이전까지와는 다른 행보를 보인다. <언노운 걸>은 현재 한국에서 상영 중인 영화로 평가가 이뤄지고 있는 상태며 필자도 보지 못했다. 그러므로 필자가 다루고자 하는 다르덴의 영화는 (필자의 임의적 기준에 따라) 전기에 속하는 것들이다. 그 중에서도 <약속>은 필자가 아직 보지 못한 영화지만 다르덴 형제의 작품은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의식 하에서 이뤄지는 변주라는 점에서 크게 상관없지 않을까 한다. 



네 개의 눈으로 포착한 삶

다르덴 형제(이하 ‘다르덴’)의 영화는 관습적인 감상을 거부한다. 논리적 합리성을 갖춘 서사와 완결된 형태로서의 결말(가능하다면 교훈적인), 유명 배우, 흥미 유발을 위한 시각적·청각적 장치 등, 흔히 ‘영화’라는 장르에 기대하는 어떤 전형적인 요소들이 다르덴의 영화에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산업화된 영화 규격을 따르지 않고 자신들만의 미학과 주제의식을 일관된 자세로 견지한다. 덧붙이자면, 그들의 작법은 기존의 영화 제작 방식에 대한 반감에서 파생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의도를 명확히 전달하기 위한 순수한 의도에서 나왔다고 보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로제타>, <아들>, <더 차일드>, <로나의 침묵>. 단도직입적인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다르덴 영화의 중심에는 ‘인물’이 있으며 중심인물이 둘 이상을 넘지 않을 만큼 개인에 초점을 맞춘다고 할 수 있다. 그 인물들은 대부분 하위 노동 계급, 무산 계급에 속하며, 다르덴은 그 삶의 단편을 채취해 영화에 담는다. 영화 속에 담긴 그들의 삶은 한 마디로 지리멸렬하다. <로제타>는 여행용 캠핑카에서 생활하는 빈민 실업자를, <아들>은 자신의 아들을 죽인 소년원 출신의 범죄자와의 우연한 만남을, <더 차일드>는 올바른 윤리 의식을 갖추지 못한 부랑아, <로나의 침묵>은 불법 이민자의 삶을 다룬다. 그들은 고단한 삶의 끝에서, 모두 윤리적으로 지탄 받을 만한(때로는 범법 행위까지) 일을 저지른다. 하지만 이는 그들의 윤리 의식 부재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보편적인 윤리적 기준을 지키기 어려울 만큼 사회의 변방으로 밀려난 현실을 적나라하게 재현하는 수단으로 기능한다.



다르덴 형제가 삶을 재현하는 방식

사회적 소수자를 소재로 삼은 영화는 많지만, 우리가 다르덴 영화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그들이 소외된 삶을 재현하는 방식에 있다. 이는 앞서 언급한 비관습적인 작법과 이어진다. 네오리얼리즘 영화로 분류되는 다르덴의 영화는 쉽게 말하면 다큐멘터리와 닮았지만, 극(劇)적인 서사 구조를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극영화’에 속한다. 거의 1인칭 시점에 가까운 다르덴 영화는 대부분 핸드헬드 기법으로 촬영되는데, 카메라의 움직임은 영화 속 인물의 (흔들리는)삶의 궤적을 충실히 따르며, 거의 언제나 인물의 뒤에 위치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인물보다 한 박자 느린, 쫓아가는 촬영 방식을 통해 감독으로서 어떤 인위적인 개입을 배제하고, 어떤 면에서는 철저히 객관적으로 그들의 ‘삶’의 단편을 충실히 기록하는데 역점을 둔다.




또한 다르덴은 전문 연기자를 거부한다. 다르덴 형제가 배우에게 요구하는 것은 육체적인 것이기 때문인데, 스타 배우가 지니고 있는 전형적 이미지와 관습적인 연기 방식은 그 자체로 영화의 현실감을 떨어뜨리기 때문이다. 즉, 다르덴은 영화 속의 배우가 아니라 현실의 인물을 자신들의 영화에 담고자 하는 것이다. 다르덴 형제는 이를 위해 비전문 배우들을 고용해 만족스러운 모습이 만들어질 때까지 끊임없이 리허설을 반복한다고 한다. 즉, 다르덴 형제는 가공되지 않은(것 같은방식(객관적인 시선과 비전문적 배우의 고용)으로 다큐멘터리적 현실감을 흡수해 영화적 ‘리얼리즘’을 성취하며, 그 현실감을 통해 관객들이 영화 속 인물들의 ‘삶’에 동화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르덴 형제의 영화의 궁극적인 의도는 무엇일까. 단순한 ‘전달’과 ‘기록’을 위한 것이었다면  다큐멘터리가 더욱 적합하다. 하지만 극영화의 형식을 취함으로써, 단순히 ‘전달’하고 ‘기록’하는 방식(실제로는 가공된 것이지만)으로 자신들의 의도를 역설적으로 성취한다. 앞서 말했든 다르덴 영화 속의 삶은 단편일 뿐이다. 그 삶에는 당위성이 부재한다. 수전 손택의 표현을 빌리자면 왜 그 일이 일어났는가가 아니라어떤 일이 일어났다는 점을 보여준다.” 영화 속에서 그들의 삶은 설명되지 않는다. 그들은 사회에서 철저히 소외된 소수자로, 경제적인 어려움에 시달린다. ‘돈’문제만 해결된다면 그들의 삶도 정상 궤도를 탈 수 있을 것처럼(<로나의 침묵>에서 로나가 상가건물을 계약하며 새로운 생활을 기대할 때처럼) 보인다. 허나, 그들 중 누구도 만성적인 빈곤 상태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다. 다르덴은 그 이유에 대한 설명을 생략한다. 다르덴 영화 속에서 그들은 다만 고통 받고 있으며 관객들은 그 이유를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



이 생략과 추정의 과정에서 다르덴 영화가 가진 진수가 드러난다. 사실 다르덴은 ‘생략’하지 않았다. 다르덴 영화 속 세계는 자본주의 질서가 주도하고 있으며, 그곳은 우리가 사는 세계다. 그것으로 설명은 충분한 셈이다. 이제 우리는 ‘추정’할 수 있다. 자본주의를 채택한 나라에 사는 누구든(그러니까 거의 모든 관객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실업’, 즉 경제적 어려움이 온전히 개인의 책임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설사 개인의 책임이 있다고 해도 국가의 책임이 전무한 상황은 존재하지 않음을 안다. 우리는 모두 이 자본주의의 역설을 알고 있으며,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를 실제 삶에서 겪고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영화 속에서 개인으로 존재했던 인물들은 더 이상 개인이 아니게 되고, 탈계급화된 존재로서의 그들을 특정 집단(하위 노동계급, 무산계급 등 소외된 계층)으로 규정한 관객(우리 자신)들은 수치심을 느끼게 된다. 그들은 우리가 소외시킨 이웃이며, 우리가 눈감고자 했던 현실, 결국 우리 자신임을 알게 된다. 극소수의 부유한 계층을 제외하고는 우리들 중 누구도 그 자본주의 역설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며, 그 사실을 모르지 않으면서 누군가를 소외시키는 것에 일조한 우리 모두는 그들을 타자화할 수 없을 것이다. 관객들은 이러한 과정을 통해 다르덴 영화 속의 인물들과 동화된다.



또한 다르덴 영화의 결말은 언제나 절망에 가깝다. 절망이 숙명이 된 그들의 삶이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은 그 어디에도 없다. 더욱 절망스러운 것은 그 절망에 가까운 결말도 결코 끝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영화가 끝날 때까지도 그들의 삶은 나아지기는커녕 더욱 나빠질 뿐이다. 그들이 ‘삶’을 대할 수 있는 태도는 어떻게든 버텨내는 것, 그뿐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이 현실임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즉, 다르덴은 영화를 결말짓지 않으며 자신의 영화 속의 인물들의 고통스러운 ‘삶’은 아직도 현재진행중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여기서 궁극적으로 다르덴 형제가 영화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 즉 그들이 관객에게 요구하는 윤리적 역할이 선명해진다. 영화가 끝날 때까지 관객은 감독이 관찰한 ‘삶’을 다시 관찰하는 무기력한 시선의 주체였을 뿐이다. 허나, 영화가 끝나면 자신의 이야기가 된다. 무언가 해야 한다는, 어떤 당위적인 욕구, 윤리적인 욕구를 느끼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이 서로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들의 모습을 담은 영화를 어느 일요일 차고나 카페에서 보여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사람들 사이에 어떤 결속력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다르덴 형제가 요구하는 윤리적 역할은 거창하지 않다. 개인에게 사회적 책임을 지우려는 것도 아니다. 그저 자신의 주위에 있는 사람에게라도,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졌으면 한다는 것이다. 설득하는 것도 아니며, 설교적이지도 않다. 다만 우리 주위에 이런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한국의 현실도 다르지 않다. 얼마 전 방송통신위에서 지난 해 지상파 4개 채널 등 6개 채널에서 방송된 드라마 43개 등장인물의 직업과 연령을 분석한 결과 주인공의 직업은 전문직이 42%인 반면 블루칼라는 0.8% 불과했다고 밝힌 기사를 접했다. 그리고 대선 후보 중 한 명이었던 심상정 정의당 대표는 유세기간 중 '노동이 당당한 나라'를 외쳤다. 그들은 단지 그 사실을 전하고 싶었을 뿐이다. 그래서 나는 다르덴의 영화를 동기(動機)적 윤리성을 담보하는 리얼리즘의 진수라고 말하고 싶다. 



다르덴 형제의 영화를 통한 리얼리즘 형식에 대한 짧은 단상

모든 리얼리즘 예술이 가지고 있는 모순이자 역설, ‘진실(real)’을 추구하지만 절대로 ‘진실’이 될 수 없는 리얼리즘은, 추구하는 것(진실)과 그 추구를 방해하는 한계(진실)로 작용하는 것이 동일한 자기 모순적인 형식의 예술이다. 이러한 리얼리즘의 성격에 대한 끝없는 논쟁을 반복하고 싶지는 않다. (그것은 논쟁이 아니라 사실 불가능한 것에 대한 무의미한 노력으로 보인다) 다만, 이러한 리얼리즘의 역설, 즉 리얼리즘 형식의 한계는, 형식적 한계에 그친다는 점에서 특별한 지점을 갖는 것이 아닐까. 리얼리즘 예술을 접하는 모든 관객은 ‘리얼리즘’이 ‘진실’, ‘실재’, ‘현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단순한 기록으로 보이는 뤼미에르의 <열차의 도착>도 감독의 주관으로 포착된 현상이며, 다큐멘터리 역시 같은 맥락에서 온전한 진실의 매체라고 할 수 없다. ‘리얼리즘’ 하의 모든 예술은 플라톤적 예술관을 벗어나지 못한다. 모두가 그 한계를 인지하는 상태에서 리얼리즘 예술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관객들은 섣불리 리얼리즘 예술을 가짜’, ‘단순한 모방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다르덴 형제의 영화처럼 매우 치밀하게 구성된(그들의 영화에서도 ‘세트’가 사용된다), 거의 현실에 가까워 보이는 것들을 ‘가짜’라고 단언하며 거리 두기가 불가능한 것이다. 결국 관객은 그 사이에서 혼동하는 주체로서 리얼리즘 예술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고민하게 된다. 이 고민은 어떤 인간도 세계를 완전히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없다는 점에서 인간의 인지능력이 가지는 한계가 리얼리즘 예술에서의 한계와 다르지 않다는 사실에 닿는다. 그러므로 (자신만의 주관을 통해 세계를 인지하는) 관객들이 리얼리즘 예술에서 보는 것은 작가라는 한 ‘개인’이 자신이 인지하는 (주관적인) 세계를 최대한 객관적으로 묘사한 어떤 작품이다. 같은 작품이라도 관객들마다 ‘현실’로 인지하는 정도가 다른 이유는 사람들마다 시야의 각도가 다르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리얼리즘 예술은 인간의 인지 능력을 최대한 발현하여 역설적으로 그 인지 능력의 ‘한계’를 담아낸 진실한 형식이라고 할 수 있으며, 넓은 관점에서 모든 예술이 리얼리즘에 속한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즉, 관객은 자신의 앞에 놓인 것이 진실한 것이 아님을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진실한 것, 현실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관객들이 리얼리즘 예술을 수용하는 방식은 이렇게 리얼리즘 예술의 자기모순적인 성격과 닮았다. 그러니 관객들은 리얼리즘이 그리는 현실, 그 차가운 단어를 받아들이는 동시에, 그 차가운 현실에서 자신의 역할이 무엇인지 고민하게 된다. 그리고 “영화 이미지의 창조적 구성(다르덴 형제가 영화에서 현실감을 성취하는 비관습적 방식)을 통해 현실에 주체적이고 실천적으로 개입할 수 있다”는 들뢰즈의 주장처럼, 그 고민을 추동하는 예술이 바로 리얼리즘 예술로서 진정한 가치를 지닌다.


*참조

다르덴 형제의 영화 미학 고찰, 「프랑스문화연구」 제12집,  2006,  pp. 63~78, 김의석.

다르덴 형제 영화에서 ‘노동’의 의미와 형식미학한국콘텐츠학회논문지 12(9), 2012.9, 93-105, 안숭범.

<씨네 샹뗴>, 강신주·이상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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