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hyeon Mar 21. 2018

자기소개서

당연히 탈락한 나의 첫 자기소개서.

1. 자기소개서 

(1) 나의 자기소개서이자 자기 소개에 대한 단상 

<비기너스>의 올리버가 그렇듯 나 또한 ‘관계 맺음’에 자주 무력하다. 누구를 만나는 일부터, 어딘가에 속하는 일이 무용하게만 느껴진다. 물음표가 어울리지 않는 의문들은 너무나도 지루하다. 그럼에도 관계를 원하는 나 자신과 마주할 때면 힘겹기까지 하지만, 관계 맺음을 완전히 끊을 수는 없다. <송곳니>에서처럼 자유와 고립을 구별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싶지는 않으니까. 그래도 가끔 어떤 관계를 발견한다. 이 관계가 나에게 무엇인가 주리라는 확신이 들 때가 있다. 허나, 나에게 다가오는 관계도 있지만, 내가 다가가야 하는 관계도 있다. 이제 무력감은 어려움으로 바뀐다. 겨우 발견한 관계 앞에서 난 나 자신을 잘- 설명하기 위하여 고민한다. 괜찮고 짧은 말들로 나 자신을 간단하고 분명하게 설명하고 싶다. 나를 돌아본다. 했던 생각들과 썼던 글들. 최근에 만난 누군가들의 인상. 내게 주어진 시간이 충분치 않다. 이내 시간과 상관없이 불가능함을 다시금 깨닫고 단조로이 인적사항을 읊는다. 마치 나의 이름과, 나이를 생각해내기 위해 고민했던 것처럼. 올리버는 가장 무도회에서 애나를 만났다. 가면을 쓰고서 말이다. 난 가면을 써도, 가면을 쓰지 않아도 어렵다. 가면을 썼는지, 쓰지 않았는지도 확실치 않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 낙심하진 않는다. 나를 모르기만 하지는 않으니. 또, 당연한 일이니.  


 그래서 난 마주한 당신에게 되묻고 싶다. 나를 어떻게 보는지. 나는 끊임없이 스스로에 대해 고민하지만 도무지 결론을 내릴 수가 없다고, 부탁하는 질문을 하고 싶다. 어떻게 봐줬으면 하는 마음도 있고 혹은 어떻게 비춰졌으면 하는 마음도 있다. 사실 말솜씨가 형편없는 탓에, 어떤 무책임일 수도 있다. 그래도 난 쓰면서, 고민한다. 그러다가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도 싶다. 회의주의자는 아니다. 가끔 재미없지는 않은, 극단적인 생각을 즐길 뿐.  


 읽는다는 표현이 어울리지는 않지만, 요즘은 존 버거(저)의 책을 읽는다. 존의 책을 읽으면, (이제는 완전히 불가능하지만) 존 앞에서는 자기 합리화를 하거나 겸손을 떨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데, 고작 책 몇 권을 읽고 그를 온전히 이해하는 사람으로 보이고 싶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얼마전까지만 해도 존을 몰랐다. 존을 아는 사람들도 몰랐다. 계기는 수업 중의 교수님의 추천이었다. 다른 작가들도 많았지만 유난히 존 버거라는 이름이 귀에 박혀 도서관에서 『다른 방식으로 보기』를 빌렸다. 그런데 어느 쪽에선가 책을 덮었다. 난 한 권의 책으로 존을 스쳐 흘릴뻔 했다.  


친하게 지내는 누나의 집들이를 하는 날이었다. 거창한 차림새의 술상을 양껏 즐기고 나니, 눈이 조금 풀렸다. 워낙 집이 아늑한 탓에 (좁은게 아니라고 했다) 풀린 시선이 흐를 곳이 많지 않았다. 누나의 책은 의자 위에 쌓여있었고, 책상 앞에는 의자가 없었다. 얼마 전에 넘어져 엉덩이를 다쳤음에도. 역시 누나는 다른 방식으로 보는 사람이구나. 한참을 쳐다보고 있어서인지 누나가 『무의미의 축제』를 추천해줬다. 기억이 거의 남아있지 않지만 재밌게 읽은 느낌이 떠올라, 이미 봤다고 말했다. 누나는 짧은 고민 후에 『그리고 사진처럼 덧없는 우리들의 얼굴, 내 가슴』을 추천해줬다. 누나는 작년 존의 추모 전시에서 더 많은 책을 사오지 못해 아쉽다고 말했다. 나는 몰랐다. 존도, 존을 좋아하는 누나도. 이제는 조금 더 알게 된걸까. ‘그리고 사진처럼 덧없는 우리들의 얼굴, 내 가슴’ 제목을 외웠다. 커피를 마시며 차분히 읽기도 했고, 맥주와 막걸리를 섞어 마시고 들어온 날, 침대에 누워 책장에 머리를 찧으며 읽기도 했다. 


 언젠가 다시 활동하기를 바라는 밴드, ‘로로스’의 노래 제목인 줄로만 알았던 『여기, 우리가 만나는 곳』도 존의 책 제목 중 하나였다. 로로스의 보컬 도재명은 가장 최근의 앨범에서 ‘토성의 영향 아래’ 태어난 벤야민을 담았다. 피차일반, ‘알레고리의 숲’을 헤매는 난, 도재명의 음악을 듣지 않을 수 없다. "버거는 복제기술의 사회문화적 영향에 대한 그의 사유와 문제의식이 상당 부분 발터 벤야민으로부터 영향을 받았음을 밝힌 바 있다. 주지하다시피 벤야민의 ‘산보’ 혹은 ‘만보객 되기’라는 독특한 문화비평적인 실천은(….)” 바로 얼마전에 교수님과 만나 요즘은 존 버거의 책을 읽고 있다고 말했다. 왠일이냐는 투정스러운 말을 반갑게 던지신 교수님은 『벤투의 스케치북』을 읽어보라는 말을 덧붙이곤, 곧장 자신의 글들 몇가지를 주셨다. 


 그 중 하나의 제목은 “존 버거라는 ‘행운아를 기억하며.”다. 정말이지,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존은 행운아다. 나는 <북촌 방향>과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보며 문득 세상의 일들이 우연 같은 필연인지, 필연 같은 우연인지, 알 수 없다는 사실을 느꼈다. 존은 헤맬 수밖에 없는 세상을 ‘잘’ 살아냈다. 그건 진실로 ‘행운’이다. 존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난 얼마전에야 존을 알았고, 존의 책을 제대로 읽기로 맘 먹은 것은 이 글을 쓰는 기준으로 고작 며칠 전이다. 그래서 존을 행운아라고 내가, 말하는 것은 우습다. 많은 이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존을 바라보듯, 존은 어떤 설명으로도 불충분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나는 존을 봤다. 『존 버거의 초상』에서 존과 50년을 함께한 장 모르가 찍은 존을 보면 분명히, 보인다. 


 나도 존과 같은 행운아였으면 좋겠다. 내 굴곡진 삶도 끝내 곡선으로 정리됐으면 한다. 나라는 사람이 “어떤 확립된 정체성을 논하기가 거의 불가능할 만큼 매우 헌신적이고 복합적인 활동상을 펼쳐낸 바 있”기에, ‘행운아’처럼 괜찮고 짧지만, 많은 것들을 포괄하는 말로 설명될 수 있다면. 혹 누군가는 나를 설명하는 일을 포기하고, 그저 어떤 느낌으로 나를 기억해줬으면 좋겠다. 파편이어도 좋으니 그렇게 세상 온 곳에 존재할 수 있다면. 다만 내가 나임이 드러나지 않는 방식으로. 존이 내 주변 곳곳에 있었다는 사실을 몰랐던 얼마전의 내가 느꼈던 것처럼. 허나, 과연 내가 장 모르가 목격한 존처럼 건초를 나르면서, 그저 옆에 서서 지켜보기만 하는 사람에 그치지 않을 수 있을까?   


책의 제목은 “없는 말들”, 목차는 “김지현, 영화, 수호, 형, 아빠, 정영문”


그렇다. 나는 지금처럼 자기소개를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로 가득 메울 때가 많다. 세상은 내가 아니면서 나를 이루는 것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지난 학기에는 책을 쓰는 수업을 들었다. 그래서 당연히 책에 들어갈 글을 썼다. 교수님은 타인에 대해서 쓰면서, 관계의 결이 자신에게 주는 의미를 곱씹기를 원하셨지만 난 나 자신을 쓰기로 했다. 교수님은 내키지 않은 것이 분명했고, 나는 고집을 피웠다. 교수님의 걱정이 어떤 것인지 알았고, 교수님이 걱정하는 대로 쓰지 않을 자신도 있었다. 난 나 자신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타인을 포함한 다른 모든 것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순수하게 인간과 인간만의 관계는 존재할 수 없다. 그게 진실에 가깝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건 인간이 그 자체로 온전할 수 있다는 환상이나 마찬가지다. 고흐는 그랬다.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진실된 예술은 없다” 그래서 나는 고흐의 그림, ‘한 켤레의 신발’을 보고 대지에 발 붙여, 고된 삶을 살아가는 한 아낙을 떠올린 하이데거에 공감하며, 그것은 철학적 논쟁과 무관하게 인간을 이해하는 하나의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매개를 통해 서로를 알아가며, 종종 우리 자체가 매개가 되기도 하며, 그리하여 우리는 온전한 ‘서로’를 알 수 없음을 느끼지만, 그럼에도 서로에게 닿기 위하여 노력한다. “정신적 본질이 언어 속에서 전달되는 것이지, 언어를 통해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이 핵심”이라고 말했던 벤야민처럼 본질이란 이미 우리의 일상 속에 자연히 스며들어, 이제는 단순히 알아볼 수 없는 어떤 것인지도 모른다. 주체와 타자를 어떻게 명확히 구분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나의 책은 나와 관계한 여러가지를 통해 흘러간다. 지금의 자기소개서도 마찬가지다. 결국 그 책도, 자기소개서도 하나의 매개체인 것처럼, 모든 것은 매개라는 뫼비우스 강의 물결을 따라 과정에 머무르는 상태로 흐른다. 그리고 그렇기를 바란다. ‘완성’과 ‘도달’은 없기에. “미완성이 절정”이라고 말하는 이브 본느프와를 생각하며. 관계에서 드러나고 드러내며, 드러나지 않고, 드러내지 않는 ‘나 자신’의 모습들은 어떻게 다를까. 안다고 생각했던 사람도 어렵고, 모른다고 생각했던 사람도 어렵다. 그래서 관계가 어렵다. 그래도 우리가 멀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자기소개서에서 존 버거와 벤야민, 나와, 누나와 교수님이 그렇듯이.  


 결국 나의 자기소개서는 나 자신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과 같을 지도 모른다. 한 인간을 알아가는 일은 어렵다는 얘기로 퉁치려는 것처럼 보일까 걱정되기도 한다. 그래도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나 자신을 포함해, 누군가를 설명하는 일은, 그저 나 자신, 누군가로 그칠 수 없기에, 우리는 모든 것과 접점을 가지고 살아가는, 살아가야 하는 인간이기에, 이 변명 같은 사족은 신중, 혹은 지나친 신중이지 않을까. 그리하여 모르긴 몰라도 내 책이나 자기소개서에는 내가 담겨있을 것이 분명하다. 이 정도면 누군가는 나를 보며 물음표를 떠올리지 않을까. 그 물음표는 또 하나의 관계가 시작되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매거진의 이전글 나의 삶의 한때는 여백이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